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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유월의 노래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 지난겨울이 얼마나 매섭게 추웠는지를 까맣게 잊게 만들 만큼 더위가 성큼 다가왔다. 아니 이미 여름 같다. 그런데 날이 더워진 탓인지 뒤늦게 집 마당에서 대나무가 죽순을 올리기 시작했다. 본래 서울에서는 기후상 대나무가 자라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 집 마당에서는 대나무, 그것도 왕대가 잘 자랐다. 하지만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예년과 달리 5월 중순이 지나도록 대나무에서 죽순 올라오는 것이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 지난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탓에 대나무 뿌리가 얼어 버려 죽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기우(杞憂)였다. 시절 감각에는 좀 늦었지만 집 마당에 있는 대나무의 땅속 뿌리는 기어이 튼실한 왕대 죽순들이 마당 곳곳에서 땅을 뚫고, 심지어 바닥 벽돌을 뚫고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 벽돌을 뚫고 심지어 그것을 머리에 이고서도 죽순이 솟아오르는 신기한 모습을 어린애처럼 보다가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방사선 모양으로 지어진 제법 커다란 거미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에 붙어 있는 왕거미 한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때 문득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붙인 달 이름이 떠올랐다. 저마다 광야에 선 시인과 다를 바 없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일 년 열두 달을 각각 다르게 이름 지었다. 유월을 예로 들면 ‘옥수수 수염이 나는 달’(위네바고족), ‘더위가 시작되는 달’(퐁카족), ‘나뭇잎이 짙어지는 달’(테와 푸에블로족), ‘황소가 짝짓기하는 달’(오마하족),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체로키족) 등이다. 특히 체로키족이 명명한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이라는 유월의 이름처럼 나 스스로 유월에 행동하게 된 것이 우연일지라도 신기했다.



 # 서양에서 유월은 가장 젊은 달이다. 까닭은 유월(June)이 ‘젊은이’를 뜻하는 라틴어 ‘이우니오레스(iuniores)’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반면 흔히 우리가 젊은이의 달이라고 생각하는 오월은 정작 ‘노인’을 뜻하는 라틴어 마이오레스(maiore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게다가 유월은 가장 많이 결혼하는 달이기도 하다. 그만큼 젊고 농업시대에는 가장 생산성이 높은 달이기도 했다. 게다가 스웨덴과 핀란드 같은 북구에선 6월의 셋째 금요일을 하지(夏至) 축제로 기념한다. 하지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때를 이름이다. 그만큼 생명력이 충일한 시기가 바로 유월이다.



 #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시인의 육필시집 『환합니다』 중에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시다. 그렇다. 가장 파괴적인 단어가 ‘나중’이고 가장 생산적인 단어는 ‘지금’이다. ‘즉시현금(卽時現金) 갱무시절(更無時節)’이란 말도 있다. “지금이 곧 그때이고, 그 시절은 다시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모든 게 찰나다. 모든 게 순간이다. 지금은 다시 없다. 지금이 그때다.



 # 흔히 유월을 가리켜 호국영령의 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부르면 슬프다. 죽어서 박제화된 느낌이다. 본래 이 나라를 지켜낸 호국영령들은 젊었다. 죽순 같았고 꽃봉오리 같았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푸른 대나무로 다 자라기도 전에, 활짝 꽃피워 보기도 전에 시대 속에서 산화했다. 하지만 그것은 값없는 죽음이 아니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삶을 이어 나갔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없었다. 그들이 그 순간, 그 시절에 몸 바친 까닭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지금을 산다. 젊고 찬란한 유월에 우리가 그들을 기억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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