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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비밀금고 300년 봉인 해제 검은돈 새 은신처 찾아 대이동

스위스의 에벌린 비드머슐룸프 재무장관이 29일 낮(현지시간) 수도 베른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국에 생방송으로 진행됐다. 비밀금고(계좌)와 관련한 정부 결정이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슐룸프 장관은 “금융법 개정안을 올 7월 의회에 제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바로 1934년 제정된 금융비밀보호법을 바꾼다는 얘기였다. 이 법은 비밀금고의 법적 토대였다. 스위스 비밀금고의 문이 79년 만에 열리게 되는 셈이다.

 슐룸프 장관은 “은행 임직원들이 미국 정부가 요청하면 정보를 제공해도 된다”고 말했다. 미국의 집요한 요구에 백기를 든 것이다. 로이터·블룸버그 통신은 “법 개정 이후 미국뿐 아니라 독일·프랑스 등도 같은 수준의 정보 접근권을 갖게 된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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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금융전문지인 유로머니는 이날 “스위스 비밀주의 전통이 300여 년 만에 깨졌다”고 묘사했다. 스위스 비밀금고가 17세기에 탄생해서다. 당시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을 선언했다. 이후 출처가 베일에 가린 돈들이 스위스로 몰려들었다.

 법 개정이 끝나면 스위스 은행들은 범죄 혐의 등이 있는 고객 정보를 사실상 전면 공개할 수 있게 된다. 미국 등이 자국법에 따라 탈세 등 범죄 혐의자라며 정보를 요구하면 스위스 은행들은 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혐의자의 계좌 관리를 담당한 임직원 정보도 제공 가능하다.

 지금까지 비밀은 간간이 누설됐을 뿐이다. 2008년엔 독일 정보기관이 스위스 은행 직원을 매수해 독일인 계좌 정보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또 2010년엔 미국이 스위스 은행인 UBS를 압박해 미국인 4000여 명의 계좌를 열어봤다. 이 모든 것은 편법이나 불법이었다.

 지금껏 스위스 정부는 법 개정을 거부해 왔다. 하지만 돌연 “법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올해 안에 개정 작업을 마치겠다고 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슐룸프 장관은 “미국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태세여서 내린 결정”이라고 실토했다.

 사실 미국은 비밀금고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 스위스계 은행 임직원을 형사처벌하겠다고 으름장 놓았다. 그 바람에 그들은 샌드위치 신세였다. 미국 정부 요구에 따르자니 스위스 법을 위반한 꼴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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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슐룸프 선언으로 12년에 걸친 미국·유럽연합(EU)의 비밀금고 공개 작전은 일단락됐다. 이들은 2001년 9·11테러 이후 스위스를 파상적으로 압박했다. 오사마 빈 라덴 등의 테러 자금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통해 흘러든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전 스위스 중앙은행 부총재인 로리 나이트 영국 옥스퍼드메트리카 회장은 올 4월 기자와 만나 “미국은 9·11테러를 구실로 스위스 비밀금고를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특히 미국은 탈세와 돈세탁 등을 도와준 은행들이 자국 금융회사들과 돈 거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까지 만들었다.

 미국은 세계의 금융허브이고 미 달러화는 세계의 기축통화다. 어떤 은행도 미국 금융회사들과 자금이체 등을 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비즈니스를 할 수 없다. UBS 등 스위스 은행들이 미국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미국과 EU의 공세는 글로벌 금융·재정 위기 이후 더욱 거세졌다. 나이트 회장은 “그동안 비밀금고를 묵인했던 서방 우파 정권이 요즘엔 그 금고를 여는 데 더 적극적’이라며 “탈루 세금을 추징하면 증세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적잖은 성과가 예상된다. 스위스 비밀금고를 열면 세계 300여 개 조세피난처(Tax Haven)의 자금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유로머니는 “조세피난처에 세워진 페이퍼컴퍼니들이 자금거래 때 주로 활용하는 통로가 바로 스위스 비밀계좌”라고 전했다.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을까. 조세피난처 자금 규모는 특성상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글로벌 비정부기구(NGO)인 조세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가 지난해 내놓은 추정치는 21조~32조 달러(2경3500억~3경5800억원)였다. 네트워크 쪽은 “각국이 조세피난처 자금을 집중 추적하면 1900억~2800억 달러(약 210조~310조원) 정도 세금을 더 거둬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영향력 안 미치는 모스크바 각광

 스위스 금융비밀보호법 개정은 ‘귀족 금융(프라이빗 뱅킹)’ 판도 변화를 더욱 빠르게 할 전망이다. 스위스는 억만장자들의 돈을 주로 관리하는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의 본고장이었다. UBS·크레디트스위스 같은 대형 금융그룹뿐 아니라 프라이빗 뱅킹만을 전담하는 소형 은행들이 취리히·다보스 등에 널려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들이 관리하는 외국인 자금이 “2조 달러 이상”이라고 29일 보도했다.

 스위스의 금융비밀 보호가 흔들리면서 귀족자금의 이탈 조짐이 이미 일고 있다. 실제 20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프라이빗 뱅크 롬바르오디에(Lombard Odier) 관계자가 지난달 서울을 찾았다. 새로운 본거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계로 스위스에 살고 있는 그는 기자에게 “스위스나 리히텐슈타인은 프라이빗 뱅킹의 홈그라운드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며 “스위스 정부가 고객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하면 글로벌 자금의 탈유럽 흐름이 더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우려한 고객정보 공개가 마침내 결정됐다.

 현재 스위스를 이탈하는 자금이 선호하는 곳은 아시아의 싱가포르와 홍콩, 중동의 두바이, 러시아의 모스크바 등이다. 이 중 싱가포르가 가장 각광받는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차명계좌가 합법화돼 있어서다. 억만장자들이 자금을 맡겨두기에 안성맞춤이다. 유로머니에 따르면 싱가포르 프라이빗 뱅크 자산이 2008년 3000억 달러 규모에서 2012년엔 6200억 달러로 급증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스위스만큼 미국 압력에 취약하다. 그래서 최근 주목받는 곳이 바로 모스크바다. 롬바르오디에 관계자는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의 정보 공개 압력에 굴하지 않을 인물”이라고 귀띔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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