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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꽃제비 사지로 보낸 외교부의 깜깜이·무성의 대처

정원엽
정치부문 기자
꽃제비 출신 탈북 작가 김혁(31)은 17세 때 북·중 국경도시인 함북 회령의 교화소에 수감됐다. 탈북을 시도한 주민을 가둬두는 ‘전거리 12교화소’는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았다. 자고 나면 시체가 쌓인다는 이곳에서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몽골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게 2001년. 그는 지난해엔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이 ‘북한의 꽃제비 연구’였다. 4살에 어머니를 잃고 청전 역전에서 구걸로 연명하던 자신의 아픈 체험을 토대로 했다. 그는 북한 원문 연구를 통해 꽃제비가 유랑·떠돌이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코체비예’에서 유래했다는 걸 밝혔다.

 그런 그가 밤을 지새우며 28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라오스에서 체포된 꽃제비 출신 탈북 청년과 소년 9명의 한국행을 위해 애써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편지에서 김혁은 “인권도 인간도 없는 그곳으로 어린 청소년들이 다시 끌려가지 않도록 대통령님께서 도와주세요”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저도 열일곱 살 나이에 감옥에 갇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간 삶의 밑바닥을 경험했습니다. 북송 후 북한 당국으로부터 받게 될 처벌이 얼마나 처참하고 가혹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견디기 힘듭니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는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 편지를 마무리하던 시간, 탈북 청소년들은 이미 북한 당국에 이끌려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지의 우리 외교공관이 손을 놓고 있던 사이 북한 당국은 외교력을 총동원해 탈북자 일행의 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으로 보내줄 테니 따라나서라”는 라오스 당국의 말에 안도하며 강제북송길을 떠났을 탈북 청소년들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탈북자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 외교 당국의 무관심과 무력함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엔 정도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외교력도, 정보능력도, 성의도 낙제였다. 라오스 정부가 탈북 문제에 중요한 정책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도 우리 당국은 깜깜했다. 라오스에 억류돼 있던 18일 동안 단 한 차례도 이들을 면담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선교사 부부의 수차례 도움 요청엔 “괜찮을 것”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재외공관은 본국 손님 맞이보다 동포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데 충실하라”(21일 재외공관장 간담회)고 지시한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았다.

 탈북 청소년들을 자기 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진 않더라도 장관의 딸을 특채하려 묘안을 짜고 서울에서 온 국회의원이나 고관대작들의 관광 일정을 챙기는 데 기울이던 열정의 반만 쏟았다면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 더욱 안타깝다.

정원엽 정치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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