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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이반 일병'이 '라이언 일병'보다 40배 많았건만 …

겐나디 보르듀코프
모스크바국립언어대 교수
러시아사회연구자연합회장
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적이 있다. 영화는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반 일병 구하기’에 세계인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44년 여름에 이루어진 유럽 해방은 노르망디가 아닌, 벨라루스의 숲에서 나와 막강했던 독일군 후방을 용감무쌍하게 공격했던 소련의 빨치산 부대로부터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그 며칠 뒤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됐다. 데이비스는 사실 동시에 시작된 두 개의 강력한 군 작전을 비교하며 “미군 일병이 과연 ‘바그라티온’ 작전에 대해 들어봤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44년 6월은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변에 상륙한 것을 의미할 뿐 이때 소련군이 드비나 강을 넘은 사실은 묻혀 있다.



특별 기고 - 2차대전 종전 기념일을 돌아보며

5월 9일 전승기념일을 맞아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젊은 여성이 참전 용사들에게 꽃을 선사하고 있다. [사진 이타르타스]


붉은 군대, 나치군 사단 674개 궤멸시켜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로 보자면 ‘라이언 일병’보다 러시아의 ‘이반 일병’이 40배나 많다. 그러나 소련군을 기리는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군의 역사적 공적을 인정하면 연합군이 유럽을 구출한 의미가 퇴색이라도 된다는 듯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한 러시아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승전의 의미를 조각조각 나누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그런 질문들이 과연 나치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전 세계를 구출하기 위해 생명을 던진 사람들에 대한 예의일까?”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재평가하려는 사람들은 전쟁 당시 이미 유력한 정치가들이 내린 평가를 애써 무시한다. 42년 5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련군이 궤멸시킨 독일의 전력은 25개국 연합군 모두가 한 것보다 명백히 크다”고 말했다. 44년 처칠 영국 총리도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내가 예전에 말한 것을 내일 영국 의회에서 다시 말할 것입니다.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바로 소련 군대였음을”이라고 언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전장은 소련~독일전선 또는 동부전선이었다. 동부전선은 북미전선, 이탈리아 및 서부전선보다 4배가 컸다. 41년엔 4000㎞, 42년엔 6000㎞를 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동부전선의 붉은 군대는 674개 나치군 사단을 궤멸시켰다. 영·미 연합군은 41~43년 북아프리카에서 9~20개 사단, 43~45년 이탈리아에서는 7~26개 사단, 두 번째 전선이 열린 후 서유럽에서는 56~75개 나치 사단과 전투했다. 41~45년 영·미 연합군이 176개 사단을 생포했던 반면, 소련군이 파괴한 독일군 사단은 607개에 달했다. 나치 전투기의 70%, 탱크의 75%, 화기의 74%가 동부전선, 붉은 군대와의 전투에서 파괴됐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불씨가 타고 있었던 극동의 포성이 잦아들었다. 마흐무트 가레예프 장군은 “45년 8월 일본군은 병사 700만 명, 전투기 1만 대, 함선 500대를 보유했던 반면 미국과 아·태 지역 동맹국은 군사 180만 명, 전투기 5000대였다”고 말했다. 소련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관동군 주력이 대미 전선에 배치됐을 것이고, 그렇다면 전쟁은 2년 더 지속돼 피해도 늘었을 것이다.



물론 영국과 미국이 소련군을 경제적으로 지원했기에 동부전선에서 나치를 더 신속하게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이 독일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게 옳을까? 1차 군사경제 지원 협약에 따라 미국은 무기대여(lend-lease) 절차를 통해 동부전선에서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41년 10월~42년 6월 30일 사이에 폭격기 900대, 전투기 900대, 중ㆍ소형 탱크 1125대를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아크베르딘 대령의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이 실제로 받은 것은 폭격기 267대(30%), 전투기 278대(31%), 중형 탱크 363대, 소형 탱크 420대(34%)였다. 이런 상황은 그 이후 계속됐다. 겨우내 벌어진 전투 이후 붉은 군대에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43년 봄, 북대서양 항행이 위험해지자 이 항로를 통한 물자 공급은 1년6개월 이상 중단됐다.



유럽의 인명 손실 절반 이상이 소련 국민



과거를 난도질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무자비한 전쟁의 냉정한 진실을 어떻게든 외면하려 했다. 이 전쟁에서 사망한 소련 국민은 2700만 명이었고 그중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다. 900만 소련 군인도 전장에서 죽었다. 영국의 사망자는 37만5000명, 부상 36만9400명이었으며, 미국은 40만5000명이 죽었다. 이들을 포함해 총 107만6000명이 모든 전선과 해전에서 사망했다. 소련의 희생은 이처럼 컸다.



벌써 10년 동안 ‘기억의 전쟁’ ‘기념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숫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련, 그리고 신생 러시아는 단 한 번도 이러한 공동 승리의 공을 소련에만 돌린 적이 없으며, 독일에 대항한 연합국들 중 누가 더 큰 공을 세웠는지를 따지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한 적도 없다. 또한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옛 소련 공화국들의 역할을 절대로 폄하하지 않았다. 승전의 기억에는 국경과 민족이 있을 수 없다. 누구도 끔찍했던 인명 살상의 아픔이 서린 승전기념일을 민족주의나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명목으로 훼손할 수 없을 것이다.



겐나디 보르듀코프

모스크바국립언어대 교수

러시아사회연구자연합회장

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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