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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73) 소선거구제 도입

제13대 총선거를 앞둔 1988년 2월 평민당 당원과 시민 4000여 명이 중선거구제를 소선거구제로 바꾸라고 주장하며 서울 중구 명동성당 주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시위대 중 한 명이 ‘중선거구 막아내어 민정당을 몰아내자’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평민당은 김대중 총재(전 대통령)가, 민정당은 노태우 대통령이 이끌고 있었다. [중앙포토]


1987년 7월 10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을 했다.

‘남겠다’는 나 장관 … 전 대통령 “그럼 전별금 이리 줘”



 “제 역할은 다한 것 같습니다. 연말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여당 당적을 가진 사람이 선거 주무부처인 내무부 장관을 맡아서는 제대로 일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국회로 복귀시켜 주십시오.”



 “음, 그래요. 당신 말이 맞네.”



 전 대통령은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줬다. 사표를 쓰진 않았지만 네 번째 공직 사의였다. 다음 날 전국 시·도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내 역할이 끝나서 이제 물러난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인사를 했다.



 7월 12일 일요일 대통령 주재 오찬이 잡혔다. 약속 장소인 청와대 녹지원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다. 나를 비롯해 장관 6명이 와 있었다. 전 대통령이 의원 겸직 장관 모두를 부른 것이었다. 내 이론을 전 대통령이 확대 적용해버렸다. 난감했다.



 밥을 먹기 전 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전 대통령은 “수고했다”고 말하며 봉투 하나씩을 6명에게 줬다. 전별금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러세요.”



 “조기상 정무 제1장관은 입각한 지 두 달밖에 안 됐습니다. 그리고 정무장관은 원래 당적이 있는 사람이 맡도록 돼 있지 않습니까. 면제해주시죠?”



 “예외 없어. 그냥 원칙대로 다 해야지. 저기 이세기 체육부 장관도 올림픽을 앞두고 있지만, 원칙대로 하는 게 좋겠어.”



 그러더니 전 대통령은 나웅배 상공부 장관을 보며 말했다.



 “아 참, 나웅배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나웅배 장관은 전국구 의원으로 지역구 의원인 다른 장관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나 장관은 바로 답했다.



 “아, 네. 전 남겠습니다.”



 장관을 계속 하는 대신 의원직을 포기하겠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전 대통령 반응이 재미있었다.



 “그래, 그럼 남아. 그거 이리 줘.”



 전별금 봉투를 돌려달라는 뜻이었다. 정말 그는 나 장관 몫의 봉투를 회수했다.



 7월 13일 개각 발표가 났다. 두 달의 짧은 내무부 장관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난 세 개 부처 장관을 거쳤지만 재임 기간은 교통부 6개월, 농수산부 14개월, 내무부 2개월에 불과하다. 다 합쳐도 1년10개월이다. “장관을 세 번 했다” “직업이 장관이다” 등의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했던 이유다.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돌아가자마자 새로운 임무가 맡겨졌다. 선거구제를 뜯어고치는 일이었다. 87년 개헌을 앞두고 선거제도연구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은 나와 구용상·유흥수·김중권 의원 등 다섯 명이었다. 소위가 마련한 선거구제 개정 방안은 두 가지였다. 1안은 1구 1의원의 소선거구제, 2안은 인구 비례 지역대표제인 중·대선거구제였다. 소위의 협의를 거쳐 88년 1월 초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에게 보고를 했다. 이 자리에 이재형 국회의장, 채문식 민정당 대표가 참석했다.



 이 안을 가지고 원내 4당은 협상에 들어갔다. 민정당의 심명보 사무총장과 나, 통일민주당의 황낙주 의원, 평화민주당의 김봉호 의원, 공화당의 최재구 의원 등 각 당에서 대표들이 모여 협상한 결과 소선거구제로 결론이 났다.



 선거구 획정은 ‘투표의 등가성(等價性)’과 ‘지역 대표성’이 조화되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선거구를 획정하는 데 합리적인 기준이 필요했다. 나는 한 선거구에서 뽑는 의원 정수와 유권자 수와의 비율인 선거구별 인구 편차의 허용 범위를 3.5 대 1로 한정했다. 이때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투표의 등가성이란 개념을 도입했다.



 소선거구제는 동반 당선에 대한 비판을 일소하는 효과를 거뒀다. 88년 3월 8일 소선거구제를 바탕으로 하는 의원선거법 개정안은 4당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다. 우리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일대 사건이었다.



 소선거구제는 지금도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정책엔 부작용이 있다. 선거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소선거구제 때문에 영·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패권주의 정당이 출현했다. 우리 정치가 한 단계 성숙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소선거구제를 입안한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지난 2010년 사회통합위원장으로 일하며 한국정당학회와 함께 석패율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새 정치를 하려면 비례대표제 의원 수를 늘리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석패율제를 도입해야 한다.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지식] 석패율제(惜敗率制)



지역구에서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고도 애석하게 패배한 후보를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시키는 제도. 일부 지역구 후보가 비례대표 후보로 이중 등록하도록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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