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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건륭황제와 매카트니 대사

최근 영국에서 발행되는 모 시사주간지 표지의 인물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 표지에는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청대 황제의 곤룡포를 입혀 패러디하였다. 동 주간지는 “1793년도처럼 파티를 열어보자(Let's party like it's 1793)”라는 제목으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시진핑의 이상(ideal)인 중국몽(中國夢 Chinese dream)을 보도하고 있다.



1793년은 당시 중국(청)의 건륭제(乾隆帝) 재임 53년이 되는 최 전성기의 해로 중국은 전 세계 GDP의 35% 이상을 차지하는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해 여름 영국의 매카트니 대사가 황제의 생신(만수절)축하 사절로 중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176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시장개척의 필요성이 증대되는 가운데 3억 인구를 가진 거대한 소비시장인 중국은 광주(廣州)항을 제외하고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매카트니(G. McCartney)(1737-1806)대사를 생신축하의 명분으로 파견, 양국의 교역을 위한 수교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영국의 속셈은 포튜갈이 주강(珠江)입구에 마카오를 빌려 물품창고(godown)로 사용하듯이 양자강(揚子江) 입구의 주산(舟山)열도의 섬 하나를 빌리고 싶어 했다.



매카트니 일행은 1792년 가을 영국을 출발 8개월에 걸쳐 이듬해 여름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동인도회사의 선박으로 바꾸어 타고 천진(天津)에, 다시 운하용 배를 이용 수도 북경(北京)에 도착하였다.



83세의 생신(8월13일)을 맞이하는 건륭제(1711-1799)는 피서행궁 열하(熱河), 지금의 승덕(承德)에 체류하고 있었다. 북경의 원명원에서 휴식을 취한 후 매카트니 일행이 육로로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에 도착했을 때는 1793년 8월4일이었다. 연암 박지원은 이보다 13년 전 건륭제의 70세의 만수절을 축하하는 조선사절의 일행으로 열하를 다녀가면서 유명한 “열하일기”를 남겼다.



당시 화이질서(華夷秩序)의 중국에서는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열하에 온 모든 외국인은 공사(貢使) 즉 조공사절이었다. 매카트니도 공사의 한사람으로 황제를 알현할 때는 삼궤구고두례(三?九叩頭禮)를 올려야 했다. 황제 앞에 신하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가 닿도록 조아리는 것이다. 이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포위 된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 태종 황태극(皇太極)에게 송파 삼전도에서 치룬 치욕의 예와 같다.



중국황제는 조공국(朝貢國)에게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배려로 이대소사(以大事小)와 박래후왕(薄來厚往)의 원칙에 따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피는 입장에서 가져 오는 조공에 관계없이 후하게 답례하였다.



러시아 대사의 경력이 있는 매카트니는 영국은 중국의 신하국이 아니므로 이러한 알현 의전을 거절하고 영국식으로 무릎을 반쯤 굽히는 반궤(半?)를 주장하였다. 중국은 무례한 매카트니와 교섭을 할 수 없었다. 매카트니는 아무런 소득 없이 북경을 떠나야 했다. 귀로에는 경항(京杭)운하를 이용 항주를 거쳐 광주에서 일시 머물었다가 이듬해 1794년 영국으로 돌아갔다.



건륭제는 멀리 영국(英吉利)에서 자신의 덕(德)을 칭송하기 위해 온 매카트니 일행을 환대하여 가장 측근인 군기대신 화신(和?)을 접반하게 하는 등 예를 갖추었다고 하나 수행했던 영국 외교관의 일기에는 “거지처럼 들어갔다가 죄수처럼 행동하고 좀도둑처럼 빠져 나왔다”고 서술할 정도로 외교사절로서 치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에 영국은 중국의 매카트니 일행에 대한 비상식적 행동이 50년 후 아편전쟁을 불러 왔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남경조약으로 매카트니가 원했던 주산열도의 섬 대신에 홍콩 섬을 할양받았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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