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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72) 87년 6·10 민주항쟁 ②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날 오후 이 내용을 보도한 중앙일보(당시 석간)를 시민들이 읽고 있다. [중앙포토]


나는 발언을 이어갔다.

“명동성당 전경 투입 땐 내년 서울올림픽 물거품”



 “전투경찰 투입 계획을 얘기할 게 아니라 투입 여부부터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반대합니다. 첫째, 전경을 명동성당에 투입하면 결국 계엄령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부·수녀들이 탱크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둘째, 벌써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 내년 서울 올림픽을 못 열겠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전경을 성당에 투입하면 서울 올림픽은 못 열고 회수될 겁니다. 셋째로 성당에 전경이 강제 진입하면 바티칸에서 가만있겠습니까.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가톨릭에서 불매운동 한마디라도 하면 한국 경제는 망합니다.”



 내 발언을 두고 토론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 앞으로 쪽지 한 장이 전달됐다. 대통령이 통화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잠깐 사이 내가 반대한다는 내용의 직보가 청와대 본관으로 올라갔나 보다. 바로 옆 전실(前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고 장관, 해방구가 뭔지 알아요?”



 전두환 대통령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돼 있었다. 당시 명동성당 안에서 시위 참석자가 해방구 선언을 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러시아 공산혁명 때 나온 말로 알고….”



 “아니, 맨날 회의만 하면서 물이나 마시고 말이야.”



 빨리 결론을 내고 이의를 달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사태를 잘 수습하기 위해 토론 중에 있습니다. 잘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전 대통령과의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회의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강우혁 청와대 정무 제2수석, 안무혁 안기부장과 민정당 이춘구 사무총장이었다. 하지만 4시간 넘게 진행한 회의에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회의 후 나와 안무혁 부장, 이춘구 총장 이렇게 셋이 따로 남아 머리를 맞댔다. 이상연 안기부 차장도 합석했다. “명동성당에 경찰 진입은 안 된다”고 전 대통령에게 내일 오전 다시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안무혁 부장이 1차로 대통령과 면담하고, 그래도 안 되면 2차로 주무장관인 내가 재건의하기로 전략을 짰다.



 6월 13일 오전 9시 대통령 주재 시국관계회의가 소집됐다. 청와대 본관 회의실 입구에 나를 비롯해 참석자 모두 도열했다. 전 대통령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안 부장이 대통령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안 부장은 이미 대통령과 면담을 마친 상태였다.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짓으로 ‘어떻게 됐느냐’고 신호를 했다. 안 부장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더니 ‘O’자를 그렸다. ‘됐다.’ 속으로 안도했다.



 전 대통령은 나에게 시국 상황을 보고하라고 했다.



 “일부 시민이 동조·가담하거나 고무하고 있습니다. 경찰 역시 피로가 쌓여있는 데다 시민들의 야유로 사기가 많이 위축돼 있습니다.”



 내 설명이 끝나자 전 대통령이 대응 지침을 밝혔다.



 “정부로서 명동성당 사태에 대해 인내를 보여주도록 합시다.”



 명동성당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지 않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었다.



 이제 명동성당에 모여 있는 시위대를 평화적으로 해산시키는 일이 남았다. 이상연 안기부 차장과 조종석 시경국장이 중간에서 수고를 많이 했다. 명동성당 안의 학생들은 투표를 했고 6월 15일 해산하기로 결론을 냈다. 함세웅 신부로부터 “이들의 무사 귀가를 보장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경찰버스에 태워 각 대학 캠퍼스에 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안전하게 학생들을 수송하라”고 단단히 지시를 했다. 함 신부에게 한 약속은 지켜졌다.



 명동성당 사태는 그렇게 평화적으로 해결됐지만 6월 민주항쟁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다.



 6월 18일 오후 5시30분 민정당 당사 대표실에서 노태우 대표를 만나 30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나는 “경찰의 질서유지 능력이 한계에 달했다”고 치안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정치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노 대표는 이미 정치적 결단을 숙고하고 있는 눈치였다.



 6월 29일 오전 9시30분 노 대표는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했다.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88년 2월 평화적 정부 이양을 실현토록 해야 하겠습니다.”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인 6·29 선언이 공표되는 순간이었다.



 만일 그때 명동성당에 전경 병력을 투입했었다면 6·29 선언이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날 공안장관회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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