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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서 순식간에 느껴진 최용해의 잔꾀





[전영기 JTBC 앵커의 뉴스레터]

시간은 위대합니다. 시간 속에서 일이 형성되며, 시간이 지나면 삶은 중지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학을 완성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영원한 현재’라고 묘사했는데(AD4세기 “참회록”) 하나님을 영원성과 현재성이라는 시간의 속성으로 정의한 게 흥미롭습니다.



평일 저녁 8시50분은 제 뉴스의 시작시간입니다. 몸과 정신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다 그 시간과 만나면 오프닝 멘트를 날리고, 뒤에 전개되는 리포트들은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똥별처럼 차례로 세상을 향해 날아갑니다.



베이징에서 사흘간 초조하게 기다리던 최용해가 시진핑 주석을 만난 게 확인된 시각은 24일 오후 7시30분쯤이었습니다. 뉴스 시간까지 1시간 남았지만(8시30분까지는 스튜디오에 가야 하므로) 그 시간은 내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가처분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헤드라인 뉴스를 사전녹화 해야 하고, 클로징멘트를 손봐야 하고, 30개쯤 되는 기사를 속독으로 읽은 뒤 해당 앵커 멘트를 수정하는 숨가쁘게 기계적인 시간이었죠.



숨가쁘게 기계적으로 시간을 쓰고 있는데 마음 속 한구석 여~엉 찜찜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최용해가 시진핑을 만나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베이징발 톱뉴스로 나가는데 ‘이걸 그냥 단순 전 달만하고 말 일인가?’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6자회담은 전혀 예기치 못한 소리였기에 뉴스성이 그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우선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보도국에서 이 기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거나 따져보는 기사를 추가로 제작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기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 들을 앞두고 ‘단순 전달 외에 무슨 일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시간 앞 무력감과 함께 ‘그래도 이건 아니다. 앵커는 마지막 제작자이자 최초의 시청자 아닌가. 뭔가 해야 한다’는 내면의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럴 땐 경험칙상 내면의 소리를 따라가는 게 만족도가 높습니다. 저는 다른 기사들 보는 걸 중지했습니다. 그리고 ‘미니해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의 절벽 앞에서 작품을 만들 땐 생각의 각도를 예리하게 해야 합니다. 군소리 말고 자신을 믿고 자판을 두드리는 거죠.



그래서 순식간에 쓴 미니해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6자회담은 최용해가 시진핑을 만나기 위해 외교적 잔꾀를 부린 건지 모른다. 그러니 6자회담의 진정성을 증명하려면 북한은 조선중앙방송 같은 공식기관이 공식발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을 수 없다. (2) 6자회담이 비핵화를 위한 국제회의라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 회담이 열리던 2003~2007년 기간 중 북한은 1차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했다. 6자회담이 열리더라도 그것이 비핵화를 위한 회담이 될 지,핵무기 선언을 위한 회담이 될 지는 가봐야 한다.



이처럼 제 미니해설은 추측+팩트+전망으로 이뤄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북한은 조선중앙방송의 국방위원회 성명에서 6자회담은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핵보유국의 위용을 늘어놓기만 해 제 추측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까지 안 썼던 ‘괴뢰 대통령 박근혜’라는 실명 비난을 추가했습니다.



중국의 시진핑에게는 아양을 떨거나 굴욕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저자세더니 한국에는 한층 위협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북한은 6자회담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팩트와 관련해서 6자회담이든 북미회담이든 회담이 열리는 기간엔 평화가 있었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대체로 평화가 있었지만 그건 북한 마음먹기에 달린 평화였습니다. 6자회담이 진행중이던 200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제1차 미사일 실험, 제1차 핵실험이 차례로 있었습니다. 6자회담과 평화의 상관관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전망과 관련해서 6월 초에 있을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과 6월말 있을 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을 재개한다는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북한은 6자회담을 ‘핵 폐기 회담’이 아니라 ‘핵 선언+핵 군축 회담’으로 이끌어 가려고 할 겁니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그 전과 질적으로 다른 어마어마한 보상을 국제사회에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보상의 상당 부분은 한국이 부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6자회담은 기본적으로 국제회의이기 때문에 남북불가침협정 폐기, 개성공단 차단, 단거리 핵미사일 같은 로컬이슈들은 의제에 오르지 않습니다. 6자회담과 관계없이 남북 간에 결제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는 뜻이죠.



6자회담의 의미와 가치를 우습게 보자는 게 아닙니다. 사실에 근거해 상황을 인식하고, 북한에 대해 조국의 안전을 지키고, 미국조차 지켜줄 수 없는 국익을 직시하자는 겁니다.



북한은 미국을 의식하고, 중국의 눈치를 보며, 일본의 추파를 즐기고 있는데 한국에만 봉쇄와 협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들 머릿속에 한국은 봉이라는 인식이 가득합니다. 6자회담이 성공하려면 북한의 이런 인식부터 교정해줘야 합니다.



전영기 JTBC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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