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현장 속으로] 95전95패 똥말 '차밍걸'의 위대한 도전

95전95패 나는 경주마, 이름은 ‘차밍걸’ 몸집 작지만 포기는 몰랐다 그런 내게도 팬들 생겨 내일 지면 최다 연패 신기록 기적이 일어날까



100㎏ 모자란 왜소한 몸집, 우승 못해도 꼴찌 두 번뿐
“큰 말들 틈서 뛰는 모습, 성실히 사는 소시민 같다”

95전95패. 2005년 태어난 ‘차밍걸’이라는 8세 암말의 성적이다. 95번 레이스에 출전해 1위는커녕 2위를 한 적도 없다. ‘매력적인 소녀’라는 뜻의 예쁜 이름이 있지만 사람들은 ‘똥말’이라고 부른다. ‘똥말’은 성적을 낼 가능성이 없는 말을 비하해 부르는 경마계의 은어다.



 차밍걸은 26일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자신의 96번째 레이스에 나선다. 차밍걸은 현재 1995년 95연패 기록을 세운 당나루와 함께 최다 연패 기록을 나눠 가지고 있다. 26일 경주에서 우승을 못하면 차밍걸이 새로운 기록을 쓰게 된다. 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겨난 뒤 최다 연패 말에 오르는 셈이다. 최영주(47) 조교사는 “차밍걸은 사람으로 치면 40대라고 볼 수 있다. 지난해와 비교해도 확연하게 기력이 떨어졌다. 기적이 없는 한 1위는 힘들다”고 했다.



 경마는 승부가 곧바로 상금·배당금 등 금전으로 환산되는 살벌한 승부의 세계다. 그래서 경마장에서 터지는 고함소리에는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는 듣기 힘든 에너지가 잔뜩 담겨 있다. 못 뛰는 말은 좀처럼 살아남기 힘든 곳이다.



 차밍걸은 몸무게가 430㎏이다. 500㎏을 훌쩍 넘는 다른 경주마보다 100㎏가량 덜 나간다. 그래서 몸집도, 보폭도, 폐활량도 작다. 진 빠지게 달려야 간신히 다른 말을 쫓아간다. 도무지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변영남(70) 마주는 왜 차밍걸을 퇴출시키지 않았을까. 치과의사인 변 마주는 “차밍걸은 사람으로 치면 잘나지는 않았지만 속이 꽉 차고 성실해 잔꾀를 부리지 않고 제 몫은 다 하는 말이었다”고 설명했다.



 차밍걸은 95전을 치르는 동안 1, 2등은 못했지만 3등은 8번 했다. 변 마주는 “몸집도 작은 게 끝까지 악착같이 따라잡아 3위로 골인했다. 조금만 결승선이 뒤에 있었다면 2등도 할 뻔했다”고 회상했다. 성적은 형편없지만 막상 꼴찌를 한 적은 별로 없다는 것도 차밍걸의 특징이다. 95번 달려 최하위를 한 건 겨우 두 번뿐이다. 변 마주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투지가 있다. 뭐든 알고 있는 것처럼 눈빛이 또랑또랑한 녀석”이라고 말했다. “2년쯤 전부터 차밍걸이 매번 지는 게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몇 번 신문에도 나왔다. 그 기사를 보더니 제 아들이 불쑥 ‘아버지께 그런 면이 있는 줄 몰랐다. 존경한다’고 하더라. 아들에게 그런 얘기를 듣게 해 준 고마운 말이다. 난 이 녀석으로 본전 다 뽑았다(웃음).”



 사실 경제적으로도 변 마주는 차밍걸에게서 본전을 뽑을 만큼 뽑았다. 차밍걸에게는 다른 말에게는 없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건강과 회복력이다. 최 조교사는 “보통 경주마는 한 번 뛰면 기력이 빠져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쉬어야 한다. 하지만 차밍걸은 한 달에 두 번씩 뛴 적도 많다. 잔병치레가 없고 금세 기력을 되찾는다”고 했다.



건강하고, 금세 원기를 회복한다. 온순하고, 차분하고, 끝까지 열심히 뛴다. 차밍걸이 95번 뛰며 우승을 못하고도 살아남은 비결이다. [사진 한국마사회]


 경주마 품종인 서러브레드는 폭발적 스피드만을 목적으로 개량됐다. 근친교배도 많이 해 관절염 등 부상이 잦다. 빠르지만 유리처럼 깨지기 쉬워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성격도 예민해 까다롭고 작은 것에도 잘 놀란다. 잔병이 없고 기력 회복이 빠른 건 사실 경주마보다는 발목이 두껍고 묵묵히 힘을 쓰는 농사용 말에 어울리는 덕목이다.



 보통 경주마가 1년에 8~9번 경주에 나서는 것과 달리 차밍걸은 2007년 12월 데뷔해 지금까지 65개월 동안 95경기를 뛰었다. 두 달에 세 번씩 뛴 꼴이다. 경주마의 한 달 관리비는 대략 130만원. 상금은 5위까지 주어지지만 12마리가 달려 10위만 해도 출주수당 형식으로 100만원 가까이 받는다. 꼴찌는 좀처럼 하지 않는 차밍걸은 늘 제 밥값은 벌었다. 올 들어 차밍걸은 다섯 번 경주에 나서 모두 403만원을 벌었다. 변 마주는 “자기가 돈 벌어서 학교 다니고, 혼자 놔둬도 속 썩이지 않고 자란 자식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한 달에 두 번씩 뛰고 가끔씩 5위 이내에 입상해 추가로 상금까지 벌 때는 조금이나마 돈도 벌어다 줬다.



변영남 마주는 “차밍걸이 은퇴 후 사랑받는 여생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 서울마주협회]
 차밍걸은 변 마주가 가지고 싶어 산 말도 아니다. 그는 “제주도에서 목장을 하던 분에게 3000만원을 못 받은 게 있었다. 그 대신 말 두 마리를 주더라. 아마 종자가 좋은 것은 따로 돈을 받고 팔고 어딘가 좀 부족했기 때문에 내게 준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고 회고했다. 그는 “차밍걸과 함께 받은 다른 말은 다루기가 너무 힘들어 몇 년 전 포기해 버렸다”고 말했다.



 변 마주는 “얼마 전 3500만원을 주고 구입한 말이 인대가 끊어지면서 경주마로서 생명이 끝나 버렸다. 통관료까지 6000만~7000만원을 써 가며 들여온 외국산 말은 관절이 아파 지금 휴양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리스크가 크지만 때로는 수익도 엄청나다. 루나라는 이름의 경주마는 다리를 절어 1000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렸지만 33경기를 달려 13번 우승을 차지하며 모두 7억5700만원의 상금을 벌어들였다. 모 아니면 도, ‘한 방의 인생역전’을 꿈꾸는 경마의 세계에서 차밍걸은 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기 밥벌이만 간신히 하는 별종이었던 셈이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차밍걸에게도 팬이 생겼다. 편의점을 운영하는 최영일씨는 “주목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열심히 달리는 모습이 안쓰럽고 대견스러웠다”고 했다. “ 중간이나 그 아래밖에 못하지만 큰 말들 틈에서 열심히 뛰는 차밍걸의 모습을 보면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에 삶을 보는 것 같다. 함부로 차밍걸을 똥말이라 부르지 말라. 차밍걸이 똥말이면 우리 같은 소시민도 모두 똥말 아니겠나.” 박종배 한국마사회 홍보팀 대리는 “차밍걸이 나오면 응원하는 마음으로 1000원씩 베팅하며 응원을 하는 경마 팬도 적잖다”고 설명했다.



 이런 차밍걸에게도 은퇴시기는 다가오고 있다. 최 조교사는 “이제 할 만큼 했다. 기록을 달성했으니 이젠 쉴 때도 됐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경주를 뛰고 나면 조금씩 아픈 곳도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변 마주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올해까지는 뛰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기왕이면 100경주 출전을 채우고 싶은 게 변 마주의 욕심이다.



 은퇴 후 차밍걸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점도 변 마주의 고민거리다. 경주마의 ‘말로’는 크게 네 가지다. 최상은 씨수말이나 씨암말로 제2의 삶을 사는 거다. 한 해 평균 400마리의 암말이 퇴역하는데, 이 중 씨암말이 되는 건 150마리 정도다. 2세를 만들 기회를 얻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는 암말이 더 많다. 승용마나 관람용 말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엔 안락사 처리된다.



 최영일씨도 차밍걸의 앞날을 걱정했다. “일본에도 차밍걸과 비슷한 말이 있었다. 113전113패를 한 뒤 물러난 하루우라다. 차밍걸과 달리 하루우라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최선을 다하는 하루우라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관중이 몰렸다. 하루우라가 경기를 하면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고 총리가 하루우라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고치 경마장의 여신’이란 별명도 붙었다. 은퇴한 뒤에는 일본 최고 씨수말의 자마를 생산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는 “차밍걸도 한국 최고의 씨수말 메니피의 자마를 갖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차밍걸의 자마가 우승을 한다면 소시민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주겠는가. 지금까지 열심히 뛴 만큼 좀 더 배려해 줘도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최 조교사는 “조금이라도 좋은 말을 얻기 위해 최고의 암수 말을 교배시키는 게 경마의 원칙”이라며 “객관적인 기량만 놓고 보면 차밍걸의 자마가 좋은 경주마가 될 확률은 떨어지지만 경마는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닌가. 차밍걸의 자마도 제대로 달리지 못할 거라고 예단할 수만은 없는 일”이라고 했다.



 변 마주는 “씨암말이 되는 건 나중 얘기다. 그보다는 마사회에서 조촐하게라도 차밍걸이 은퇴식을 할 기회를 주면 좋겠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관상용 말로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여생을 보내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경주마는 대개 20~25세 정도까지 산다. 홍용현 한국마사회 홍보팀장은 “차밍걸의 연패는 명예로운 기록은 아니지만 의미 있고 스토리가 있는 기록”이라며 “마사회도 은퇴식에 대해 고심 중”이라고 말했다.



이해준 기자

▶차밍걸은 …



-마명 : 차밍걸(CHARMING GIRL) -출생 : 2005년 3월 4일(만 8세)



-성별 : 암 -털색 : 갈색 -품종 : 서러브레드 -생산국 : 한국



-소유자 : 변영남 -소재지 : 서울경마공원 -조교사 : 최영주



-성적 : 95전95패(3위 8회, 4위 8회, 5위 2회) -등급 : 국산마 4급



-총상금 : 5694만7000원 (5위 이내 입상 상금과 출주수당은 별도)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