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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느낀다 인간의 작품 그리고 하늘의 작품



강원도 원주 산골짝에 국내 최고 수준의 뮤지엄이 들어섰다. 16일 문을 연 한솔뮤지엄이다. 1997년 개관한 한솔종이박물관의 주요 소장품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85) 한솔그룹 고문이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세계적인 빛의 작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 전시관도 갖췄다.

해발 275m 산 정상에 있던 오크밸리 산악자전거장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7년 만에 부지 7만1172 평방m(약 2만1500평)의 야외 뮤지엄이 됐다. 진홍빛 패랭이꽃 80만 주가 주단처럼 깔리고 고즈넉이 이어진 하얀색 자작나무 숲길 너머로 보이는 한 무더기 돌집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된 멋진 신세계였다.

건축에서 빛과 물과 돌의 물성을 극대화하기로 유명한 안도 다다오는 한솔뮤지엄에서도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했다. 뮤지엄의 절반은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연상시키는 워터 가든 한가운데에 걸쳐 있다. 앞에서 보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널찍한 파주석들로 쌓아올린 돌담. 워낙 높이 쌓아올려 담이 아닌 것 같지만 높이가 지붕에 약간 못 미친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지붕이 살짝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제지회사라는 정체성을 담아 지붕을 얇은 종이 느낌이 나도록 했다”는 게 한솔문화재단 권준성 경영지원팀장의 설명이다.

지붕과 돌담의 틈바구니로 햇빛이 들어온다. 그래서 돌담과 건물 사이 만들어진 골목길은 자연 채광 덕분에 은은하게 밝다.
건물 층고가 높고 전시 공간이 넓은 것에 비해 기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노출 콘크리트 내벽이 기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내 동선은 전형적인 사각형 큐브뿐만 아니라 원통형·삼각형 등의 공간으로 이어져 관람이 지루하지 않다. 총 직선거리는 700m지만 동선을 따라 2㎞ 정도를 걸으며 관람하는 시간은 2시간 정도 걸린다.

관람객 맞는 2m짜리 나일강 파피루스 나무
종이박물관인 페이퍼 갤러리에서는 살아 있는 연둣빛 파피루스가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나일강가에서 가져와 키우고 있다는데 키가 2m에 육박한다.
페이퍼 갤러리는 4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紙-종이를 만나다’에서는 종이 이전의 다양한 글쓰기 재료를 비롯해 종이를 만들었던 초지기 등 제지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기계, 한지 제조과정을 담은 동영상도 볼 수 있다. 천장에는 한솔제지에서 생산한 종이 두루마리가 둘둘 말린 채 설치미술처럼 촘촘하게 걸려 있었다.

‘持-종이를 품다’는 사방을 검정 유리거울로 만들어놓고 전시물마다 개별 조명을 했다. 할머니가 쓰던 종이 반짇고리와 호랑이 베개 등이 눈에 띄었다. ‘志-종이에 뜻을 품다’는 한솔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는 문헌류 등 귀한 유물을 전시해 놓은 공간. ‘초조대장경’ 중 하나로 화엄경 목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36’(국보 제277호)도 여기 있다. ‘至-종이에 이르다’는 시간을 훌쩍 넘어 관람객과 소통하는 21세기 공간이다. 독일의 설치예술그룹 ART+COM 의 체험작품 ‘The Breeze’가 있다. 관람객이 하얀 A4 종이를 펴들고 있으면 먹물이 떨어지듯 검정색 유체 영상이 종이 위에서 움직인다. 그것을 들고 작품 위에 물을 붓듯 종이를 기울이면 검정색 유체가 꿈틀거리며 다른 종이로 옮겨진다. 그러면서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묄쎄’라는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이 완성된다.

교과서에서 보던 작품을 한눈에
이인희 고문의 호를 따서 만든 청조 갤러리는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회화와 조각, 판화 및 드로잉 작품이 있는 곳이다. 역시 4개의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주요 작가들의 귀한 작품 100여 점이 망라돼 있다. 1관에서는 한국 모더니즘의 대표작가인 김환기·유영국과 초기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한묵·문신, 그리고 한국적 정감을 구수하게 표현한 박수근·이중섭·장욱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2관에서는 인상파에 뿌리를 둔 오지호·도상봉·박고석·이대원 등과 향토적 소재를 서사적으로 웅장하게 표현한 이쾌대·최영림·권옥연 등의 작품이 이어진다. 특히 월북 이후 가족들이 작품을 내놓지 않아 보기가 쉽지 않았던 이쾌대의 대작은 보너스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3관은 오롯이 백남준을 위한 공간이다. TV모니터와 각종 탈을 어지러이 결합시킨 높이 5.2m의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는 묘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4관은 권진규·문신·존배·최만린·심문섭의 조각 작품과 이우환·정상화·박서보·김창열 등 세계적 명성을 지닌 화가들의 그림이 나란히 한 공간을 장식하고 있었다.

‘빛의 마술사’가 만든 자연 속 명상 공간
원주산 귀래석 16만 개로 봉긋한 고분 9개를 뒤덮은 스톤 가든 끝까지 가면 한솔뮤지엄의 백미인 제임스 터렐관이 나온다. 제임스 터렐(70)은 흔히 ‘빛과 공간의 마술사’로 불린다. 특정 공간에 몇 개의 조명을 투사하고 빛의 산란 효과를 이용해 안개 속 혹은 구름 속을 걷는 듯한 환경을 만들어 새로운 오감 체험을 선사한다. 오는 6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한다.

한솔뮤지엄의 제임스 터렐관에는 겐지스필드, 웨지워크, 호라이즌, 스카이스페이스의 4개 작품이 있다. 스카이스페이스와 호라이즌의 일출 프로그램에 참가한 경험은 이렇다.

오전 4시28분. 새벽잠을 설친 관람객들이 돔 형태의 전시장 벽면 의자에 등을 기대고 혹은 누워서 하늘을 향했다. 천장 지붕이 열리면서 가로 4m, 세로 5m의 타원형 구멍으로 하늘이 보인다. 검정색 동공 같은 하늘 주위를 베이지색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그러더니 어느새 조금씩 조명색이 바뀐다. 베이지색은 인디언 핑크로, 하와이안 블루로, 강렬한 초록빛에서 부드러운 보랏빛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하늘색도 같이 바뀐다. 주변의 색에 의해 본질의 색이 이렇게 달라져 보이다니. 과연 우리가 보는 것이 모두 진실일까. 전시 제목이 ‘진실의 순간’이라 한 것도 그런 연유이리라.

어릴 때부터 비행기 조종에 능숙했던 터렐은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기 어려웠던 비행 중의 경험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보면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색칠된 조형 공간을 아니슈 카푸어가 만들었다면 제임스 터렐은 빛을 이용해 그런 공간을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달걀 모양의 하늘을 쳐다보다가 하늘과, 자연과, 그리고 오랜만에 하늘을 오랫동안 올려다보고 있는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하늘에 점점 맑은 기운이 감돌고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열심히 사진을 찍던 누군가도 이제 말 없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 시시각각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그 찰라의 순간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대신 감사한다. 오늘도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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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성인 1만2000원, 제임스 터렐관까지 보려면 2만5000원.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터렐관의 일몰 프로그램은 주말에만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 월요일 휴관. 문의 033-730-9000

원주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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