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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진실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을 기반으로 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줄곧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무라이 한 명이 깊은 숲에서 살해되고 그의 어린 아내는 강간당한다. 용의자로 체포된 험악한 산적이 자신의 범행이라 고백하기에 사건은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자신의 행위라며 지껄이는 산적, 한없이 슬프기만 한 아내, 사건을 목격했다는 증인, 그리고 무당의 입을 빌려 저승에서 이야기하는 사무라이까지 모두 다른 사건을 기억하는 게 아닌가? 그 어두운 숲 속에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진실은 하나이지만 사람들마다 다르게 보고 기억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김대식의 ‘Big Questions’ <8> 진실은 존재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진실을 ‘사실 그대로’라고 정의한 바 있다. 결국 세상엔 하나의 진실들로 구성된 사실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표현하는 게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고로 진실이란 외부 세상과 머리 안에 존재하는 내부 세상과 동일성을 의미하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로 지성과 사실 간의 방정식을 푸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만약 생각과 현실이 일치한 게 참이라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만약 현실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아무런 논의가 필요 없다. 현실은 현실이기에, 현실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러셀과 케인스의 제자이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노고’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한 영국 수학자 프랭크 램지(Frank Ramsey)는 “‘눈은 하얗다’는 진실이다”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생각했다. 눈이 하야면 어차피 진실이고, 하얗지 않으면 거짓이다. 진실이라면 “진실은 진실이다”라는 반복된 주장이 되고, 거짓이라면 “거짓은 진실이다”라는 논리적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경험을 왜 서로 다르게 기억할까
램지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기 전 이미 수학(그래프 이론), 경제학(최적 세금이론, 수학적 저축이론), 철학(진실과 확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무한으로 큰 우주에 먼지보다 못한 인간의 삶’을 우울해하는 친구에게 램지는 “하지만 그 큰 우주도 결국 인간의 머리 안에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마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거대한 태양도 결국 “엄지손가락으로 덮인다”라고 주장했듯 말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외부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하기보단 개인적으로 차이 나는 지각과 기억을 통한 간접 경험만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간접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내부적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선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아퀴나스가 말한 현실과 지성의 방정식은 사실 현실과 언어의 방정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라쇼몽’같이 동일한 경험을 서로 모순되게 기억한다면 참된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만약 객관적 현실을 결코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르네상스 학자 비코(Giambattista Vico) 같이 진실은 어차피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실은 객관적이기보다 사회·경제·역사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Karl Marx)의 가장 큰 관심은 그렇기에 사회 구성원 간 권력구조가 진실 구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였다. 역사적 진실이란 결국 힘과 권력의 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코는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신들의 역사’ ‘영웅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로 구별했지만, 결코 권력과 힘으로만 구성된 ‘갑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학자 홉스봄(Eric Hobsbawm)은 왕과 귀족 중심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보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을의 진실’이 ‘갑의 진실’보다 꼭 더 객관적이어야 하는지는 의문할 수 있겠다.

진실은 결국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이 우울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게 된다. 그게 바로 하버마스(Juergen Habermas)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진실은 어차피 만들어진다면, 그나마 가장 공평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버마스는 그래서 진실의 핵심은 사회적 합의라 주장한다. 평등과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공정한 토론을 거쳐 합의되는 진실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라는 것이다.

비코, 마르크스, 하버마스…. 물론 다 좋은 말들일 거다. 하지만 이 참을 수 없는 찜찜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만들어지지 않은, 참으로 존재하는 진실이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얀 반 하이엔노트 역시 그런 찜찜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이엔노트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했다. 가난한 네덜란드 이민자로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의 비서가 된다.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고로 트로츠키! 레닌과 함께 볼셰비즘 혁명을 주도했던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싸움에 져 비밀경찰들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는 트로츠키 옆엔 항상 그의 비서 하이엔노트가 있었다. 트로츠키를 보살펴 주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연인이 되기도 했던 하이엔노트는 그러나 1939년 갑자기 트로츠키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후 뉴욕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하이엔노트는 컬럼비아브랜다이스스탠퍼드 대학 교수로 20세기 최고의 논리역사학자로 인정받게 된다.

하이엔노트는 왜 혁명을 버리고 논리를 선택한 것일까? 어쩌면 그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은 갑을 통해 만들어지는 진실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트로츠키가 뭐라고 했던가? 스탈린의 총과 칼을 종이와 펜으로 쓴 진실로써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역사는 비웃기만 했고, 트로츠키는 암살자의 도끼에 맞아 사망한다. 스탈린도, 신도, 총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진실은 없을까? 하이엔노트는 영원한 진실을 수학에서 찾기로 결심한다.

하이엔노트의 진실 찾기도 허무한 결말로
완벽과 절대를 기반으로 발전해온 수학은 20세기 초 존재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숫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무한이란 무엇인가? 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제국이 세워졌다 멸망해도, 하늘을 찌르듯 거대한 건물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도…. 수학적 진실만은 영원해 보였다. 하지만 수많은 논리적 모순들이 하루하루 위험한 의혹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수학적 진실 역시 인간을 통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라는. 수천 년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놓은 멋진 ‘수학적 진실’이라는 성의 기반이 사실 허수였다면? 러셀과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에겐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수학적 진실의 기반을 더 이상 그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Principia Mathematica)라는 수천 장짜리 책을 완성한다(작은 사진). 마테마티카는 논리와 집합만을 사용해 완벽하고 모순 없는 수학을 구성하려 했기에 362장의 긴 논리적 증명을 통해서야 드디어 ‘1+1=2’라는 사실을 제시하게 된다. 하이엔노트가 찾았던 진실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사회주의자가 주장하든, 자본주의자가 증명하든 1+1은 항상, 영원히, 우주 그 어느 곳에서도 2여야 한다. 만물을 통치한다는 신세대 기독교 신을 믿지 못했던 후기 로마 수학자들은 그래서 반박했던 것이다: “신이 아무리 전능하시더라도 파이의 값 3.1415192…는 바꿀 수 없지 않으냐”고.

하지만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20년 고생도, 하이엔노트의 희망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1931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젊은 학자 쿠르트 괴델(Kurt Goedel)은 이미 ‘불안전성 정리’를 통해 그 어느 수학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마테마티카를 포함한 그 어느 시스템에서도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정리들이 존재하며, 수학적 증명과 진실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괴델의 증명이 수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기 시작한 후 러셀은 서서히 수학과 논리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수학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완벽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괴델은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늙은 아인슈타인의 절친한 말동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논리엔 관심 없었던 말년에는 누군가가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시달려 굶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하이엔노트는? 20세기 논리의 역사를 정리한 프레게에서 괴델이라는 책을 완성한 그는 노년에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가 살았던 멕시코로 떠난다. 추운 러시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사로운 멕시코의 햇살을 즐기며 “삶은 아름답다”라고 일기 책에 썼던 트로츠키를 기억하며 하이엔노트는 46년 전 그가 버린 옛 아내를 찾아간다. 그는 여자를 만났고, 여자는 그를 반겼다. 그리고 여자는 총을 쏜다. 하이엔노트는 죽었고 여자는 자살을 한다. ‘라쇼몽’에서 같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저승에서 변명할 수 있다면 하이엔노트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의 진실은 무엇이며, 여자의 진실은 또 무엇일까?



김대식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했다. 이후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낸 뒤 2009년 말 KAIST 전기 및 전자과 정교수로 부임했다. 뇌과학·인공지능·물리학뿐 아니라 르네상스 미술과 비잔틴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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