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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 만든 좌파 지도자 … 6·25 파병과 핵 개발

클레멘트 애틀리 영국 총리,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지도자(왼쪽부터)가 1945년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만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국 정가의 농담 중 이런 게 있다.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 옆자리에 정적(政敵)이 오자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정적은 말했다. “화장실에서까지 이럴 필요는 없지 않소.” 처칠이 응수했다. “당신은 큰 것만 보면 국유화하려 하지 않소….”

여기에 나온 처칠의 정적이 바로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다. 제2차 세계대전 VE(유럽전 승리)직후인 45년 7월부터 6·25전쟁 이듬해인 51년 10월까지 총리를 지내며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20세기 복지국가를 건설한 지도자다. 그의 리더십을 말해 주는 또 다른 키워드가 처칠과의 일화에 등장하는 국유화다. 복지국가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그는 석탄·철강 등 전체 산업의 20% 정도를 국유화했다.

조용하나 강한 추진력으로 개혁 이끌어
애틀리와 처칠은 성격도, 리더십 스타일도, 정책 방향도 서로 달랐다. 처칠이 불같은 성격에 열정적인 태도, 명연설 능력을 갖춘 전쟁 지도자 스타일이라면 애틀리는 조용한 성격과 침착한 태도, 수더분한 말투로 사람들을 설득해 나가는 평화시대의 리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드물게 둘이 일치하는 정책이 있었으니 바로 반공(反共)이다. 35~55년 좌파 정당인 노동당 당수를 맡은 그는 국내 정책에선 영국식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데 치중했다. 하지만 외교안보 쪽에선 확고하게 친미·반소·반공정책을 견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초강대국이 된 미·소가 냉전(45~91년)에 들어가자 냉정한 판단으로 미국을 편들며 자유진영의 핵심 역할을 했다. 소련이 동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불안을 느껴 좌파 정당 출신임에도 반공·반소·친미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념보다 국민·국가의 이익을 앞세운 판단이었다. 애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처칠이 주도하는 전시 대연정에 참여해 부총리를 지내는 등 일찍이 좌우를 넘나드는 리더십을 보여 줬다.

47년부터 노동당 내 좌파들은 ‘좌향좌(Keep Left)’를 주장하며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명분 아래 미·소 사이의 제3세력이 돼 중립정책을 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애틀리는 꿈쩍하지 않았다. 거꾸로 국민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소련은 물론 영국 공산당과도 멀리했다. 공산당과 가까이하는 노동당원을 가차 없이 제명했다. 국민의 지지 속에 내정 개혁을 완수하려면 공산당이나 소련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확신시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냉전으로 인해 영국 역사상 가장 큰 비용을 투입했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비 강화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쓴 것이다. 포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긴박감이 없는 것도, 총 한 방 쏘지 않는다고 해서 역사적 의미가 부족한 전쟁도 아니었다. 냉전은 아주 치열하고 위험스러웠지만 애틀리는 용의주도하게 대처했다. 우선 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 측 집단 방위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창설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영국 독자노선을 지키려면 핵무기 보유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47년 1월 독자적인 핵 개발을 지시했다. 애틀리의 핵 자주권 확보 노력은 보수당으로 정권이 바뀐 52년 남호주에서의 핵실험으로 결실을 맺었다.

애틀리의 리더십은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두 차례 기여했다.

첫째, 전후 한반도의 독립을 재확인한 45년 7~8월의 포츠담회담이다. 회담 초반에 참석했던 처칠은 7월 총선에서 패배하자 황급히 귀국했고 새로 총리가 된 애틀리가 영국 대표로 전후 처리 과정에 참여했다.

둘째는 6·25전쟁 때 미국에 이어 둘째로 많은 병력(연인원 8만7000명)을 파병한 것이다. 애틀리는 안경과 틀니 지원비 등 복지예산을 깎아 6·25전쟁 전비와 냉전을 위한 재무장 비용을 마련했다. 그가 파병한 영국군은 51년 4월 22~25일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벌어진 임진강전투(적성전투·설마리전투라고도 함)에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발의 총알을 쏠 때까지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 결과 한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서울 북방에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해 중공군이 다시는 서울을 넘보지 못하게 했다.

학벌보다 실력 있는 인재 적재적소 등용
애틀리의 리더십 가운데 좋은 평가를 받는 또 다른 것이 적재적소의 용인술이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대미 특사로 기용하고 ‘케인스 이론’을 경제정책 구상에 활용했다. 그는 학벌보다 실력을 존중해 인재를 등용했다. 37명의 1기 각료 중 대졸자는 10명에 불과했다. 19명이 노동자 또는 노동운동가 출신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시내각에서 행정 경험을 쌓았다. 그중 백미가 노동운동가 어니스트 베빈을 외무장관에 발탁한 것이다. 22~40년 운송노조 위원장과 40~45년 처칠 주도의 전시대연정내각에서 노동장관을 지낸 베빈은 오랜 노동운동을 통해 다진 협상능력과 상대방 의중을 잘 꿰뚫는 스타일로 외무장관 일을 훌륭히 수행했다. 게다가 노동운동 과정에서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공산당과 싸워 본 경험 때문에 철저한 반공노선을 유지해 애틀리와도 배짱이 잘 맞았다. 애틀리와 끝까지 임기를 같이한 베빈은 전후는 물론 냉전 초기에 영국 외교의 조타수 역할을 했다.

애틀리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정책 추진력은 처칠 못지않게 박력이 넘쳤다. 일단 공을 잡으면 곧장 골대로 돌진하는 스트라이커 스타일이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사례 하나가 전후 식민지 독립 허용이다. 제국주의자로 평가받는 처칠은 식민지, 그중에서도 노른자위인 인도의 독립에 회의적이었지만 애틀리는 이를 과감하게 추진했다. 인도는 47년 이후 인도, 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 포함),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으로 나뉘어 독립한 뒤 모두 영연방에 가입했다. 식민지를 독립시키되 가까운 친구로 남기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 데는 애틀리의 용의주도한 리더십이 한몫했다. 그는 마지막 인도 총독에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인 루이스 마운트배튼 경을 임명하고 독립협상 전권을 부여했다. 왕실의 권위를 활용해 정치권의 반대 여론을 잠재우고 협상을 순조롭게 풀려는 의도에서였다. 다만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로 나눠 독립시키는 문제는 매끄럽게 해결하지 못해 오점을 남겼다.

전후 경제난 속에서 영국을 신속하게 복지국가로 만든 것도 평가할 일이다. 애틀리는 45년 7월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전쟁에 지친 영국인들은 ‘과거의 영광’이나 되새길 것 같은 보수당 대신 ‘미래를 맞이하자(Let us face the future)’는 구호 아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자는 노동당을 선택했다. 애틀리는 일사천리로 전후 사회의 판을 새로 짰다.

그는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준비된 정책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영국이 지금도 자랑하는 국민건강시스템(NHS)은 집권 이듬해인 46년에 도입됐다. NHS는 세금을 재원으로 전 국민을 무료로 진료해 주는 획기적인 정책이다. 의료계의 반발이 컸지만 개인 개업이 가능하도록 타협안을 만들어 무마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의 자랑거리를 보여 주는 공연 도중 간호사·환자 복장의 수많은 배우와 병상이 무대에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NHS를 소개하는 장면이다. 노령보험·실업보험 등 국민보험을 강화해 대부분의 국민이 혜택을 받도록 했다. 51년까지 100만 채를 새로 짓고 50만 채를 보수하는 주택보급사업도 펼쳤다. 애틀리는 국민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라 나라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여 줬다. 애틀리 리더십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2004년 영국사 학자들이 꼽은 최고 총리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국유화는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46년 말 잉글랜드은행을 국유화한 데 이어 생산성이 떨어지고 노사분쟁이 빈번했던 석탄산업도 국유화했다. 항공·철도·화물차·운하·통신·전기·가스 등 주요 기간산업을 48년까지 차례차례 국유화했다. 자본주의가 탄생한 나라에서 이렇게 급속도로 국유화정책을 폈으니 파장이 클 만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과정을 중시하고 주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했기 때문이다. 과감한 개혁으로 영국 사회체제를 대대적으로 바꿔 놓았음에도 그의 치밀한 리더십 덕분에 충격과 저항은 미미했다. 다만 공공편의시설과 무관한 가스·철강산업을 국유화할 때 보수당이 반발했을 뿐이다. 국유화 과정의 진통은 처칠과의 ‘화장실 농담’에서나 남아 있는 정도다. 국유화 뒤 애틀리는 시장 개입을 강화해 수출을 늘리고 세수를 증대시켰다. 노조와의 대화를 통해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며 전후 재건을 주도했다. 2004년 영국사 연구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애틀리는 처칠을 누르고 영국 역대 총리 중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그런 애틀리도 49년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의 공산화, 50년의 6·25전쟁 발발로 좌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인기를 잃어 갔다. 영국민의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갈수록 커져 갔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국민을 풀어주라(Set the people free)’라는 구호로 노동당의 계획경제와 국유화정책을 비난했다. 결국 51년 10월 총선에서 20만 표라는 박빙의 표 차이로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하지만 선거불복운동이나 재검표 소동은 아예 없었다. 그는 끝까지 신사로서, 정치인으로서 명예와 품위를 지켰다.

애틀리는 런던의 중산층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사립학교와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됐다. 당시 대학 분위기는 보수 일색이었지만 그는 지역 학교에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빈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노동당원이 됐다. 하지만 조용히 자신의 신념을 유지했을 뿐 이념으로 편가르기를 하거나 국민을 분열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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