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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부자들 명품 고쳐 써 … 3대째 물려받은 가방도 있더라"

수선에서 손을 뗀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가방을 다루는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김동주 명동사 회장이 수십 년을 간직해온 악어 가방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나 프라다백이 망가졌어. 어쩌지?” “명동사에 가봐.”

명품 수선 45년, 김동주 명동사 회장



 흔히 핸드백 본사의 수선센터를 찾게 마련이지만 더 먼저 손님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 있다. 수십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명품 가방이 매년 수천 개씩 거쳐가는 곳. 명품업체들조차 고객이 맡긴 제품 수선을 위해 해외 본사보다 먼저 찾는다는 곳. 전국 5개 지점(명동 본점, 강남 1·2호점, 대구점, 부산점 등)에 직원 100여 명을 거느린, 하루 고객만도 1000여 명에 달하는 작은 중소기업. 1968년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맞은편에 조그만 수선 점포로 문을 연 뒤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명동사가 그곳이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의 단단한 콘크리트 계단을 올라 3층의 구석진 사무실에 들어섰다. 실밥이 터진 검은색 소파 위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명동사 김동주(70) 회장이다.



열다섯에 상경해 구두닦이로 시작



 전남 장흥 출신의 ‘시골내기’였던 그에게 서울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근처 광주로도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차비만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58년의 서울은 열다섯 살 어린 소년에겐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북에서 온 한 형님 덕분에 지금의 탑골공원 입구에 구두닦이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소년의 손은 작고 매웠다. 그의 손이 닿는 구두에선 반짝반짝 윤이 났다. ‘소년 김동주’에게 구두를 맡기는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얼굴에 돈을 던지며 무시하는 손님도 간혹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꾸준히 돈을 모았다. 상경 8년째이던 66년 그는 종로5가에 구두가게를 내고 젊은 사장님이 됐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첫 창업기는 혹독했다. 고정 손님은커녕 하루에 한 켤레 팔기도 힘들었다. 친구들은 수시로 찾아와 공짜로 신발을 빌려갔다. 야심 차게 시작한 가게는 결국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다시 구두를 잡아야 했다. 명동에 있던 작은 구두 수선집인 명동사였다. 하지만 명동사도 얼마 안 가 문을 닫았고, 그는 거리에 나앉아야 했다. 방황이 시작됐다. 큰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남은 건 빚밖에 없었다. 중학교만 마치고 상경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구두 수선’이 유일했다. 68년 그는 그 자리에 돌아와 명동사의 간판을 다시 걸었다. 2평짜리 조그만 판잣집에서다. 명동사 45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 어린 나이에 고생을 많이 했다.



 “결혼하고 애도 생겼는데 한순간에 거지가 됐다. ‘이대로 물러설 순 없다’는 생각에 쉬는 날도 없이 죽어라고 일했다. 나무굽에서 플라스틱굽으로 바뀌고 구두도 대중화되면서 고치러 오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기 시작하더라.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구두굽 갈아주고, 반짝거리게 닦아주고. 그러다 보니 단골이 생기기 시작했다.”



 - 명품에는 어떻게 손을 댄 건가.



 “80년대 수입자율화가 되면서 구찌·페라가모·버버리 같은 명품들이 들어왔다. 명동사 앞엔 롯데백화점이 있고, 또 그 당시 산다는 사람들이 명동에 많이 오지 않았나. 명품 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들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혹시 이것도 고쳐요?’라면서. 그렇게 조금씩 만지다 보니 좀 잘 고치게 됐다(웃음). 처음엔 정말 어려웠다. 한 땀, 한 땀 실도 꿰매야지 가죽도 다 따로 사야지…. 대부분 우리나라에선 구할 수 없는 가죽들을 쓰기 때문에 아예 외국에서 가죽을 짝으로 맞춰 들여왔다. 실제 명품 가방도 숱하게 뜯어봤고, 고물상을 뒤져서라도 가죽이나 부품을 구해 고쳐주면서 인정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기업 하시는 분들, 사모님들, 롯데 헬스 회원권 가진 손님이 많았는데 그분들 입소문 영향이 컸다.”



해외서도 찾아오는 명품 수선 1번지



 입소문을 타면서 명동사는 순식간에 ‘명품 수선 1번지’로 변신했다. 해외에 사는 동포들이 택배로 부쳐왔고, 지방에선 100여 켤레의 구두를 한꺼번에 가져와 수선을 맡겼다. 엄앵란·장미희씨 등 유명 여배우들이 직접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대기업 총수들 가방 수선도 그의 몫이었다. 백화점에서 입점 요청이 쇄도했고 전국에 지점을 내달라는 사람도 줄을 이었다. 핵심 직원들이 홍콩 등 명품 본사 수선실로 스카우트될 정도였다.



 하지만 유명세를 탄 만큼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지방에 지점을 내 기술자들을 교육시키다 직원들이 고객 명단을 몰래 빼돌려 경쟁사를 여는 배신도 당했다. 명동사에서 모음을 뺀 ‘명등사’ 등 비슷한 이름으로 오픈하거나 앞뒤 글자를 바꿔 ‘동명사’로 문을 여는 짝퉁 명동사도 많아졌다. 원래 이름 앞에 ‘명동’자를 붙이는 집들도 하나 둘씩 늘어났다.



 결국 김 회장은 확장보다 실력으로 승부를 걸기로 결정했다. 핸드백·지갑·가방별로 담당 직원을 세분화하고 철저한 재교육을 통해 ‘수선 장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러자 전국에서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김 회장은 아무나 받지 않았다. 4~5년의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쳐야만 명동사의 ‘진짜 직원’으로 인정해줬다.



“얼마 전엔 오사카에서 일본인 청년이 ‘제발 일 좀 가르쳐 달라’며 찾아왔더라. 한참을 고민하다 거절했다. 젊은 청년들도 일 배우고 싶다며 자주 온다. 그런데 여기 일이 쉽나. 단단히 각오가 된 사람들만 받는다. 와서 한 달도 못 돼 도망가는 경우도 많다.”



 유명세를 타면서 ‘짝퉁 감별사’로 나서는 일도 잦아졌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달라는 언론사와 일반인의 요청이 끊이질 않는다. 며느리에게 선물받은 가방을 가져와 “진품이 맞냐”고 묻는 할머니부터 시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명품 가방의 진위를 확인해 달라는 며느리까지. 그럴 때마다 김 회장은 “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의심을 품지 말라”며 돌려보낸다.



 - 가짜를 진짜로 알고 오는 손님도 많을 텐데. 구별이 되나.



 “당연히 된다. 봤을 땐 비슷해 보여도 만져보면 감이 딱 다르다. 물론 요즘은 가짜도 그냥 가짜가 아니다. 기술이 계속 발전하는 게 놀라울 뿐이다(웃음). 그래도 진품을 따라갈 순 없다. 가짜를 진품 수준으로 고쳐줄 수는 없고 정확히 맡긴 가방의 수준에 맞게 해준다.”



 - 진짜 진품은 수리비도 만만찮을 텐데.



 “수리비만 50만원 나오는 가방도 있다. 며칠 전엔 악어 등가죽으로 만든 가방이 들어왔는데, 물어보니 3대째 물려받은 가방이라더라. 윗부분이 조금 낡아 리폼해줬다. 검정 가방은 시간이 지나면 색이 바랠 수밖에 없으니 염색도 잘해줘야 한다. 병을 미리 예방하면 오래 사는 것처럼 명품도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필요하다. 요즘 가방 맡기러 오는 젊은 친구들 보면 참 험하게 쓴다. 고쳐지면 쓰고, 아니면 버리는 식이다. 아무리 오래된 가방도 평소에 꾸준히 손보면 계속 쓸 수 있는데…. 나이 드신 사모님들은 손볼 때가 됐다 싶으면 정확히 찾아들 오신다. 진짜 돈 있는 분들은 소중히 아껴 쓰는 법을 아는 것 같다.”



 - 못 고치는 것도 있나.



 “없다. 우리 집에서 못 고치는 건 버려야 한다.”



 - 어떻게 하면 명품을 오래 쓸 수 있나.



 “상태가 좋은 가방이나 신발을 보면 내가 이렇게 얘기한다. ‘야, 너 주인 잘 만났구나~’라고. 실제 주인을 보면 거의 100% 일치한다. 성품 고운 분들이 걸음걸이도 사뿐사뿐, 가방도 곱게 들고 다니는 거다. 이분들 특징은 자주 쓰고, 또 아껴 쓴다는 거다. 비싼 가방 샀다고 장롱에만 모셔두는 사람이 있는데, 가방도 자꾸 들어주고 만져줘야 오래 산다. 사람도 집에만 있거나 햇빛을 못 보면 탈나지 않나. 명품도 똑같다. 너무 아끼지만 말고 바깥 구경 자주 시켜줘야 한다.”



"손님들에게 받은 도움 사회 환원"



 김 회장은 현재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다. 수선에서 손뗀 지 2년쯤 됐다. 하지만 꾸준히 매장에 들러 어떤 것들이 들어와 있는지 직접 확인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그때 그 가방 어떻게 수리했어?” “이건 다른 데서 염색 한 번 한 것 같은데”라며 세심하게 챙겼다.



수십 년간 그런 모습을 지켜본 두 아들도 결국 아버지의 대를 이었다. 강남 1, 2호점이 첫째 상배(45)씨와 둘째 상곤(42)씨가 운영하는 지점이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내온 여직원은 알고 보니 큰며느리였다. 이름하여 ‘가족 경영’인 셈이다.



 칠순을 맞은 김 회장은 이제 또 다른 꿈을 꾼다. 손님들에게서 받은 도움을 다시 사회와 나누고 싶은 꿈이다. 크진 않지만 조금씩 실천하고 있다. 환갑과 칠순 잔치 때는 아들들과 함께 독거노인 400분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 부인 환갑 때도 똑같이 했다. 집안 사정으로 학업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에게 매년 일정 금액의 장학금도 내놓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손에 검은약 묻혀가며 살아왔지만 늘 정직하게 살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누군가 명동사를 알아준다는 것만으로 이미 소원성취한 거다. 남은 인생, 이제 다른 사람들 도우며 살아야 하지 않겠나.”



글=송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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