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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산속의 섬, 세상 향해 문을 열다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를 가로지르는 철길 모습. 강 왼쪽엔 학교마을, 오른쪽엔 본마을이 있다. 강가에는 낙석을 막기 위한 터널이 설치돼 있다. 철길 위쪽 끝부분이 승부역이다. [봉화=프리랜서 공정식]
경북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오지마을로 꼽힌다. 해발 500m가 넘는 산자락에 37가구 8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도로가 있긴 하지만 좁고 험해 버스도 들어가지 못한다. 영동선 열차가 다니는 승부역은 마을에서 1㎞가량 떨어져 있다. 그나마 정차하는 열차도 많지 않다. 마을은 강을 건너 산자락을 돌아 1㎞쯤 올라가야 나타난다. 승부리는 해발 1000m에 이르는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다. 마을 바로 앞에는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깎아지른 절벽이 버티고 서 있다.



경북 봉화 오지마을 승부리의 변신

 요즘 이 마을 주민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오지마을에 외지인이 조금씩 늘고 있어서다. 지난 17일 승부역은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다. 200여 명이 열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거나 경치를 감상했다. 이들은 10분가량 역 주변을 둘러본 뒤 다시 열차를 타고 떠났다. 마을에는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주민들은 “휴일이면 하루 20∼30명이 마을을 찾는다”고 했다.



 변화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식당 한 곳이 문을 열었고 민박을 준비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주민들은 마을 밭길 중간에 벤치와 포토존을 설치하고 안내표지판도 세울 예정이다. 마을을 관광지로 만들려는 것이다. 주민들은 “승부역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동네는 말 그대로 ‘오지’로 남아 있었다”며 “앞으로는 승부리가 관광지로 뜰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민들에게 지난달 12일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승부리가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관광열차가 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새로 개통된 관광열차는 하루 열 차례 승부역에 선다. 지금까진 무궁화호 여객열차가 하루 6번 정차했다. 이 열차는 주로 주민들이 이용했다. 영주·태백 등 인근 도시로 갈 때 타지만 운행 횟수가 적어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관광객은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새 노선은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158석)와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205석)다. O-train은 서울·제천역에서 출발해 경북 북부와 강원도 남서부 지역을 순환한다. 승부역엔 하루 네 차례 선다. V-train은 봉화군 분천에서 태백시 철암역을 하루 세 차례 왕복한다.



1998년부터 겨울철에 눈꽃열차가 운행되지만 연중 관광열차가 다니기는 처음이다. 지금까지 평균 탑승률은 30% 정도라고 한다. 강진영(57) 승부역장은 “아직은 운행 초기여서 마을까지 찾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했다.



 취재팀은 지난달 7일 1박2일에 이어 지난 17일 다시 현지를 찾아 주민들의 생활상을 들여다봤다. 승부리에 어둠이 내리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엔 인적이 끊겼다. 오후 8시20분 마지막 무궁화호가 승부역을 출발하자 플랫폼의 불빛마저 꺼졌다. 칠흑 같은 밤, 하늘엔 낮게 내려앉은 별들이 총총했다. 철길을 따라 흘러가는 낙동강 상류의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승부리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갔다.



17일 백두대간협곡열차에 탄 승객들이 승부역에서 잠시 내려 사진을 찍고 있다(위 사진). 주민들이 관광열차 운행을 앞두고 역 주변을 청소한 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라고 적힌 바위 옆에서 기념촬영을 했다(가운데). 본마을에 사는 심규현씨 부부가 17일 고추밭을 가꾸고 있다.
 다음 날 오전 6시. 어둠이 걷혔다. 새소리와 골짜기의 물소리로 아침이 시작됐다. 들녘엔 하얗게 서리도 내렸다. 승부리는 지대가 높아 군청 소재지보다 기온이 섭씨 3∼4도 낮다. 산이 깊어 고라니·노루·멧돼지 등이 수시로 나타난다고 한다. 집은 밭 주변에 한 채씩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돌담집 굴뚝으로 아침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승부리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경북 영주시에서 36·31번 국도를 따라 북쪽 태백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한 시간쯤 지나 석포면에 닿았다. 이어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낙동강을 끼고 폭 3∼4m의 시멘트 도로가 나타났다. 강가 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다. 맞은편에서 차량이 나타나면 곡예하듯 비켜 가야 했다.



그렇게 10여㎞를 가자 산속에 마을이 나타났다. 승부리다. 주민들은 “험한 길이지만 이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했다. 이 길은 80년대 중반에 생겼다. 시멘트로 포장된 건 90년대 말이었다. 주민들은 길이 없었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승부리는 태백산(1567m) 정상에서 20㎞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8㎞를 가면 강원도 경계에 이른다. 험준한 산속에 광활한 밭이 펼쳐져 있다. 산자락을 개간해 비스듬한 형태다. 면적은 30만㎡(약 9만 평). 주민들은 이곳에서 감자·옥수수·고사리·고추·당귀·콩·팥과 고랭지 배추 등을 재배한다. 10여 가구는 연 5000만∼1억원의 매출을 올린다. 17일 다시 찾은 승부리의 들녘 밭이랑에는 고추와 고랭지 배추가 심어져 있었다. 주민들은 고추 지지대를 세우고 배추밭에 물을 주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을 진입로가 나기 전까지 주민들은 고립되다시피 했다. 50년대 영주에서 강원도 철암까지 영암선(87㎞·현 영동선)이 뚫리면서 승부역에 하루 네 차례 열차가 섰다. 석탄 수송 철도여서 주민들에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금도 만만찮았고 마을에서 1㎞쯤 떨어진 역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다. 길이 없다 보니 산을 따라 내려와 낙동강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지금은 승부역과 마을 진입로를 연결하는 70m 길이의 현수교가 있지만 당시엔 물이 불어나면 돌다리가 잠겨 열차를 탈 수조차 없었다.



 이렇다 보니 주로 비룡산(979m) 자락인 다락재를 넘어 소천면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10㎞가 넘는 산길을 2∼3시간 지게를 진 채 걸어 다녔다고 한다. 논이 없어 쌀은 주로 영주 곡물상이 공급했다. 열차에 쌀가마니를 싣고 오면 주민들이 지게에 콩과 팥 등을 지고 가 역에서 자루째 바꿨다.



 병원은 웬만해선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밤에 위중한 환자가 생기면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환자를 둘러업고 승부역으로 달려가 역무원에게 매달렸다. 역무원이 상부에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으면 화물열차를 겨우 얻어 탈 수 있었다. 석탄 차량의 기관실 한쪽에 누워 영주나 철암의 병원에 도착하면 환자 얼굴은 석탄가루로 새카맣게 변하기 일쑤였다.



 일부 주민은 한때 양귀비를 재배해 아편을 만들어 진통제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70년대 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호롱불에 의지했다. 송분한(78·여)씨는 “열여덟에 산 너머 마을에서 시집왔는데 화전민이 많았다. 쌀이 없어 감자와 옥수수를 쪄 먹는 등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승부리는 70년대까지가 ‘전성기’였다고 한다. 집집마다 3∼4명씩의 자녀가 있었고 역무원과 철로 보수원까지 100여 가구가 살았다. 광회국민학교 승부분교장 학생이 100명도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녀 교육을 위해 주민들이 하나둘 도시로 떠나면서 분교는 93년 문을 닫았다.



태백에서 중·고교를 나온 김경철(54) 이장은 “주말에 집에 왔다가 월요일 학교로 돌아가는 길은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이상 철길을 걸어 석포면으로 간 뒤 연화광업소 버스를 얻어 타고 가면 가까스로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비포장도로여서 버스가 요동치는 탓에 한 시간 이상 달리면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60년대 이곳에서 근무했던 한 역무원은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를 역사 옆 바위에 페인트로 썼고 지금도 남아 있다. 주민 김진모(56)씨는 “태백산맥 자락에 파묻힌 승부리가 얼마나 오지인지 잘 표현한 글”이라며 “승부역을 널리 알린 멋진 문장”이라고 자랑했다.



 믿기 어려운 얘기도 있다. 승부역 옆 소천면 분천리(현 양원역)엔 열차가 서지 않았다. 주민들은 춘양에서 장을 본 뒤 보따리를 철로변에 던졌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기 힘들어서였다. 열차에서 내린 주민들은 철길을 따라 거꾸로 4㎞를 걸어가 짐을 챙겨 집으로 갔다. 우회하는 산길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6대째 이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홍재남(59)씨는 “터널 안이나 교량 위에서 열차를 만나 다리 아래로 떨어지거나 열차에 치여 다친 사람도 여럿 있었다”며 “전설 같은 얘기 아니냐”고 했다. 결국 주민들이 청와대 등에 진정해 역을 유치했고 88년부터 여객열차가 서고 있다.



 승부리 주민들은 ‘오지 관광지’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경치, 산촌의 정취 등 훌륭한 관광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콩·팥·고사리 등 친환경농산물을 팔거나 음식으로 만들어 내놓으면 소득 증대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제 승부역은 잠시 섰다가 떠나는 간이역이 아닙니다. 승부마을 역시 삶에 지친 도시민을 포근하게 품는 ‘힐링의 명소’로 거듭날 것입니다.” 김 이장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주민들 마음속에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건 좋지만 시끄럽고 눈살 찌푸릴 일은 없어야 할 텐데”라는 걱정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봉화=송의호·홍권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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