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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모리와 함께하는 주말

주철환
JTBC 대PD
주거만족도를 묻는다면 10점 만점에 9점을 줄 용의가 있다. 고득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항목은 단연 집의 위치다. 걸어서 25분이면 직장 사무실 의자에 가뿐히 앉을 수 있다. 앞에 미술관, 뒤에 공원이 있다. 반경 1㎞ 안팎에 경복궁역, 광화문역, 시청역이 있다. 이쯤 되면 거의 아파트 광고문 수준인데 이걸로 다가 아니다.



 단지가 작은 편인데도 아파트 1층에 커피전문점이 세 곳이다. 불과 몇m를 사이에 두고 미국 시애틀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브랜드, 서울 청담동에서 시작하여 뉴욕까지 진출한 한국 토종 브랜드, 그리고 아마도 종로구 사직동에만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아담한 커피숍, 이렇게 셋이 나란히 있다.



 햇볕 따사로운 주말 오후에 나의 발길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맛, 가격, 가구 배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내겐 비슷비슷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에겐 미안하지만) 손님이 덜 붐비는 곳으로 간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가장 작은 찻집의 단골이자 이웃이 되었다.



 주인 내외와 서빙하는 종업원, 이렇게 셋이 일하는데 각자의 이름은 물론 전공까지 알아버린 사이가 됐다. 1990년대 초반 학번들인데 미혼남을 중심으로 소개하자면 국문과 1년 선배와 여자 동기가 부부 사이고 본인은 올해 안에 결혼하는 걸 목표로 열심히 뛰고 있다고 했다.



 사람을 사귈 때 명랑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데 이 세 사람은 내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우수’에 속한다. ‘손님이 없어서 참 조용하고 좋네요’라며 슬쩍 놀려도 ‘오늘만 그런 거예요’라고 웃으며 맞장구친다. 아무리 봐도 손님이 넘치는 가게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 만약 이 집이 장사가 잘되면 나는 이리로 안 올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이건 좀 애매한 관계다. 주중엔 꽉 차다가 주말엔 좀 한산하다면 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카페의 이름은 ‘모리’다. 지금 주인이 정한 상호가 아니다. 입주할 때부터 모리였고 몇 년 새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바로 앞의 주인은 예전 내가 다니던 방송사 선배의 여동생이었다. 수다를 나누며 정이 드는가 싶더니 그새 떠나고 말았다. 실은 내 막내 처남도 카페 운영에 관심을 보여 우리 부부는 모리를 내심 후보로 점찍은 적이 있었다. 오며 가며 모리의 매출을 눈여겨봤는데 나중에 내린 결론은 ‘이게 잘되려면 뭔가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가게 이름을 처음 본 순간 번역서의 제목이 떠올랐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이라는 제자와 죽음을 앞둔 모리 선생님 사이의 대화를 모은 스테디셀러다. 사실 그 모리(Morrie)가 이 모리(Mori)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제멋대로 이곳을 모리 선생님의 카페로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기분에 따라 모리가 되기도 하고 미치가 되기도 한다.



 거대 체인점 사이에서 모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보기에 주인 부부는 ‘기술과 정성’을 목표로 정한 듯 보인다. 하지만 내가 특별한 커피를 맛보러 모리에 가는 건 아니다. 나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주말이면 빠짐없이 데이트 신청이 들어온다. 누가 나를 찾아올까. 절반은 지인의 자식들인데 그들은 대화라기보다 상담을 받으러 온다. ‘귀찮지 않으세요’라고 묻는다면 난 고개를 강하게 저을 참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일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세 박자에 모두 해당한다. 나는 젊은이들을 만나 대화하고 싶다.(소망)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에게 진로 상담을 해줄 수 있다.(능력) 그리고 난 나를 사랑해준 친구들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의무)



 나의 면접 조언으로 입사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 늘면서, 한편으로 동창들 사이에 이 성공 사례가 소문으로 번지며 나는 졸지에 ‘사직동 족집게 과외 선생’이 되었다. 당사자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해결책도 제시해주니 결과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 PD나 교사의 사명이 누군가가 꿈을 이루도록 문을 열어주는 거라면 지금 나는 영원한 교사, 영원한 PD의 길을 걸어가는 셈이다. 헤어질 즈음엔 슬로건 하나를 만들어 주는데 지난주엔 이 말을 선물로 주었다. “현재의 나는 객관적으로 보되 미래의 나는 낙관적으로 보라.” 모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주철환 JTBC 대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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