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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지’스럽지 않은 건 다 버린다 그래야 산다

“샤넬이나 에르메스 같은 국내 브랜드를 만들자.” 패션 한류가 화제가 될 때마다 빠지지 않는 얘기다. 지금으로선 꿈같기만 한데 ‘혹시 그라면’ 싶은 인물이 있다. 패션 디자이너 정욱준(47)이다.
그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져 있다. 2007년 파리 컬렉션에서 ‘준지(JUUN.J)’라는 남성복 브랜드를 처음 선보인 이래 꾸준히 호평을 받으면서 세계적 패션 피플들이 찾는 브랜드가 됐다. 2009년 카를 라거펠트(샤넬 수석디자이너)가 준지를 입고 피날레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됐고, 최근엔 미국 힙합가수 카니예 웨스트가 준지의 팬을 자처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전에도 그는 종종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곤 했다. 2년 전 제일모직에 남성복 총괄 디렉터(상무급)로 영입돼 ‘조직의 힘’을 빌리는 전략을 구사하던 그가 최근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올 3월 파리의상조합의 정회원이 된 것이다.
파리의상조합은 ‘파리컬렉션’을 주관하며 참석 브랜드의 패션쇼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는 곳으로, 여기 멤버가 된다는 건 세계 패션계 중심에 진입한다는 뜻이다. 현재 에르메스·루이뷔통·조르지오 아르마니 등 100여 개 브랜드만이 이 단체 정회원이다. 한국인으로는 디자이너 우영미 이후 두 번째인데, 준지가 현지 고용 직원이 있어야 하는 조건을 채우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이제 그의 새로운 목표는 무엇일까. 다음 달 컬렉션 준비를 앞둔 그를 최근 서울 청담동 준지팀 사무실에서 만났다.

카를 라거펠트와 카니예 웨스트가 찾는 옷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이 된 뒷얘기가 궁금하다.
“물망에 오른다는 얘기를 듣고도 기대하지 않았다. 회원이 추천하고, 또 동의까지 얻어야 하는 건데 현지에 매장 하나 직원 한 명이 없으니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준지의 화제성과 발전성을 높이 사 승인이 났다고 한다. 파리라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뉴욕이나 밀라노처럼 큰손이 ‘품어 줘야’ 신진들이 크는 곳도 아니고, 인종·환경·연령을 따지지 않고 컬렉션만으로 평가해 주는 곳이니까. 그래서 더 자부심이 크다.”
-그래도 누군가 밀어줘야 할 것 같은데.
“(한참 생각하다) 언론에서 굉장히 좋아한다. 데뷔 때부터 ‘트위스트’가 있는 옷을 보고는 80년대 일본 디자이너들이 다시 온 것 같다고 반겼다. 기자들이 좋다 좋다 하니까 의상조합에서 더 관심을 가진 것 같다.”
1980년대 파리 패션에선 ‘파격’ ‘실험’ 하면 일본 디자이너들이 대표적이었다. 레이 가와쿠보, 요지 야마모토 등 검은색 위주의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으로 큰 호평을 얻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그들의 디자인은 점점 상업적으로 지루해졌다.
그럴 때 준지가 등장했다. ‘리포지셔닝’을 주제로 트렌치코트라는 클래식 아이템을 다양하게 변형했다. 윗부분만 살려 케이프로 바꾸거나 점프슈트로 만드는 식이었다. 데뷔하자마자 르 피가로가 ‘주목받는 디자이너 6인’으로 꼽았고, 파리의 대표 편집매장인 ‘레끌레어’에 한국 디자이너로선 처음으로 옷을 내걸었다. 그는 “시즌마다 일관성 있게 실험적 디자인을 보여준 게 점수를 얻은 것 같다”고 했다. 올 봄여름 컬렉션만 봐도 재킷을 안에 입고 셔츠를 밖에 입는 비틀기를 시도했다.
-이제 카니예 웨스트 같은 스타 팬도 생겼다.
“지난해 이맘때 그쪽에서 연락이 왔다. 준지의 빅팬이라며 공연 의상을 협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알다시피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굉장한 패셔니스타다. 지방시를 다시 핫한 브랜드로 만든 인물 아닌가. 넝쿨째 굴러온 복이었다. 실제 그가 준지를 입는다는 게 이슈가 되면서 많은 팬이 생겼다. 얼마 전 그를 만나러 런던에 갔는데 6개월쯤 뒤 함께 협업하자는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왜 정작 한국에선 준지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쉽게 살 곳도 없나.
“진짜 명품으로 키우려면 먼저 밖에서 잘하고 싶다. 파리에서 인지도나 평가를 확실히 하는 게 우선이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10꼬르소꼬모 서울’에서만 판다. 희소성을 노린 거다. 중국도 다른 브랜드들은 앞다퉈 매장을 열지만 나는 5년 뒤를 내다본다. 베이징 조이스나 상하이 꼬르소꼬모처럼 소수의 아주 패셔너블한 사람이 가는 장소에만 가져다 놓고 ‘이게 정말 하이레벨이구나’라고 인식시키고 있다. 준지가 사람들이 좀 더 원하는 가치를 지닐 때까지 기다리는 게 순서다.”

1년에 아파트 두 채 값 날리며 컬렉션 열어
그는 자신의 캐릭터 자체가 ‘정석을 따르는 자’라고 했다. 단계를 뛰어넘기보다 차근차근 밟아가는 스타일이다. 살아온 여정이 그랬다. 아동복 사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옷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의상학과 대신 미대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의상디자인을 배우는 일이 극히 적었다. 결국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중퇴, 디자인스쿨 ‘에스모드’에서 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이때 그는 10년씩 끊어서 인생 목표를 세웠다고 했다. 30대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들고, 40대에는 파리 컬렉션을 누비겠다고 맘먹었다. 50대 과제는 글로벌 브랜드로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계획은 착착 진행됐다. 졸업 후 ‘쉬퐁’ ‘클럽모나코’ ‘닉스’ 등 국내 브랜드에서 일하다 1997년 후배와 다섯 평 남짓의 작은 사무실을 차렸다. 첫 브랜드 ‘론 커스텀’이 나온 건 3년이 지나서였다. 슬림한 라인의 남성복은 젊은 층의 주목을 받았고, 2001년 서울컬렉션에 데뷔했다.
그 후 6년 만에 파리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추천인 하나 없이 프랑스 최고 에이전시들의 문을 두드렸고, 두 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으며 파리 입성에 성공했다. 그는 지금도 2007년 첫 컬렉션이 끝났을 때를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친다. “간절히 원했던 것을 이뤄낸 환희랄까. 작가 지망생이 등단하는 거랑 비슷했다. 내 브랜드를 국제적으로 만들어 볼 수 있는 첫 계단을 밟은 것이었으니까.”
-그럼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였나.
“론 커스텀을 준비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순간이 다 어렵다. 스스로와 계속 싸웠다. 이렇게 멈출 순 없다는 생각에 계속 달려야 했다. 파리컬렉션을 처음 하던 날, 여기까지 올 줄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 말처럼 정말 꿈은 크게 꿔야 하나보다.”
-해외 컬렉션을 꾸준히 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7년 정도 홈쇼핑 판매를 했는데 그때 번 돈이 1억이면 그걸 다 쇼 하는 데 썼다. 친구들이 말렸다. 국내에서 잘 나가는데 일 년에 아파트를 두 채씩 날리면서 쇼를 하느냐고, 차라리 빌딩을 사라고 그러더라. 그땐 귀에 안 들어왔다.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컸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후배들에 대한 아쉬움을 작심한 듯 토로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파리로 진출하는 디자이너가 없다는 것이었다. 패션 한류라고 하지만 막상 디자이너는 안 보인다고 했다.
“실력이 굉장한 후배들이 방송을 타면서 유명세에 집착하는 게 안타깝다. 연예인을 만나 친해지고 방송하는 재미에 빠지다 보면 도전보다 타성에 젖기 쉽지 않나.”
해외 유학파 신진들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국내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나와줘야 한다. 업이 먼저냐 돈이 먼저냐 한번 생각해 봤음 좋겠다. 일본 패션이 왜 글로벌 브랜드로 인정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20년 동안 꾸준히 세대를 이어 디자이너가 나와줬기 때문이다.”

57세까지만 디자인 … 그 후엔 가드닝 공부
그는 2011년 9월 개인 디자이너에서 제일모직 상무가 됐다. 해외 진출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에 유일하게 3년 연속 뽑히는 ‘연애’를 하다 ‘결혼’까지 한 셈이다. 빈폴 트렌치코트 제작 등 컬래버레이션을 하면서 궁합을 맞춘 뒤에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 브랜드를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50대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첫 단추다.
-대기업에 와서 좋은 점은.
“사람들은 물적 자원이 도움이 될 거라고 하지만 인적 자원이 생긴 것이 더 중요하다. 패션은 사람 싸움이다. 예를 들어 혼자 사무실 꾸릴 땐 컬렉션 디자인만 준비하는 것도 벅찼다. 커머셜 피스(상업 판매를 목적으로 보다 보편적으로 만든 옷)를 겨우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디자인팀 인력이 되니까 컬렉션 의상만큼 커머셜 피스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게 됐다. 매출이 제일모직에 들어와 400%나 늘었다.”
-글로벌 브랜딩을 위해 가장 원했던 것은.
“패션은 홍보와 마케팅의 힘으로 큰다. 9월부터 실릴 광고 이미지를 찍고 그걸 해외 유력 패션지에 실리도록 해야 한다. 주류로 접근하게 되면 패션 비즈니스가 더 확실히 커진다. 디자이너가 갖지 못하는 전략들을 실천해주는 다양한 맨파워가 있어야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다.”
-대기업 임원이 된다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나.
“물론 부담스러웠다. 책임감이 엄청나게 커졌다. 하지만 시장은 아주 낮은 것과 높은 것으로 나뉠 것이고, 그중 한 길을 택한 것뿐이다.”
-목표가 100이라면 지금은 어디쯤 왔나.
“50, 아니 50 좀 넘게 왔다. 50이 브랜드의 색깔을 만드는 것이라면 나머지 50은 그 가치를 지키는 일이다. 지금도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준지스럽지 않은 것은 모두 버려라’라고 한다. 딱히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브랜드를 닮지 않은 디자인은 택하지 않는다. 조금씩 준지스러움이 무엇인지 후배들이 이해하고 있는 중이다.”
-60대의 로드맵은 뭔가.
“디자인은 57세까지만 하고 싶다. 그리고 60대에는 가드닝을 공부하겠다. 일에만 몰두하고 살다 보니 나중엔 아름다운 식물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
그는 대화 내내 많은 답의 주어를 ‘저는’이 아닌 ‘준지’로 대신했다. 그것은 ‘세계적 디자이너가 되겠다’와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의 차이처럼,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였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디자인은 영원할 수 없지만 브랜드는 생명력을 지닌다. 세계적 패션 하우스가 몇 백 년 유지되는 건 디자이너는 바뀌어도 브랜드만의 색깔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준지 역시 내가 떠나도 후배들이 바통을 이어받아야 한다. 그래야 전통이란 게 생긴다. 준지가 100년 뒤쯤엔 벨을 누르고 누가 문을 열어줘야 구경할 수 있는 하이엔드 브랜드가 못 되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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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