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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가는 서양 부부가 끝장 보는 이야기 恨의 정서로 풀었죠

창극 대중화를 위해 다각도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국립창극단이 또다시 실험에 나선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에 우리 소리를 입힌 것. 서양 연극의 원형인 그리스 비극을 창극화하는 최초의 작업이다. 막 나가는 부부가 끝장을 보는 이야기인 이 ‘원조 막장드라마’를 소재로 한 실험 창극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은 흥미롭게도 연극계에서 잘나가는 부부다.
연출가 서재형(43)ㆍ극작가 한아름(36) 부부는 유별난 실험정신으로 유명하다. 제목처럼 무대에서 죽도록 달리는 첫 작품 ‘죽도록 달린다’(2004)로 동아연극상 새 개념상과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하며 등장부터 주목받았다. 이후 연극 ‘왕세자실종사건’(2005) ‘릴-레-이’(2006) 등 강렬한 이미지를 끌어내는 역동적인 작품으로 자신들만의 무대언어를 확고히 했다.
최근엔 음악을 이용한 실험에 한창이다. 연극을 뮤지컬화한 ‘왕세자실종사건’(2010)으로 각종 뮤지컬상을 휩쓸고, 음악극 ‘더 코러스-오이디푸스’(2011)를 거쳐 이번엔 한국 고유의 음악극인 창극에 뛰어든 것이다. 이들의 실험대 위에 놓인 창극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13일 저녁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서울 장충동 국립창극단 연습실을 찾았다.

창극 대중화하려면 레퍼토리 다양화해야
연습실에선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강렬한 북 장단과 코러스가 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대사 없이 창으로만 이어지는 송스루 형식이 낯설게 와닿았다.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고 절정에서 막을 올려 과거로 플래시백해 가는 구조, 사투리나 고어체가 아닌 표준어에 가까운 대사도 생소했다. 일견 우리 소리의 창법을 이용한 뮤지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박애리·민은경 등 창극단 스타들이 감정을 삭이지 않고 분출하는 연기엔 분명 새로운 에너지가 넘쳤다.
한아름 작가는 서울예대 재학 시절 오태석·이윤택 선생에게 연극을 배웠다. 당시 판소리 다섯 바탕과 서양 고전을 전부 필사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그리스 비극을 창극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여기저기 제안을 하고 다녔지만 쉽지 않았죠. 이번에 김성녀 예술감독님의 작품 의뢰를 받고 냉큼 제안했더니 무릎을 치시며 오케이하시더라고요. 오랜 꿈이 갑자기 해결된 거죠.”
서재형 연출은 12년 전 창극 ‘논개’를 올린 경험이 있다. 소품 디자이너와 조연출, 1인 다역을 겸한 작품에 관객들이 창극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는 걸 보면서 언제든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단다.
그럼 왜 ‘메디아’였을까. 메디아는 조국의 보물을 훔치러 온 남자에 반해 아버지를 배반하고 형제까지 죽이지만 결국 배신당하자 급기야 친자식마저 찔러 죽인 희대의 악녀. 이런 팜므파탈과 우리 소리가 어울릴까 싶지만, 작가는 메디아를 한을 품은 여자로 봤다. 남편에게 버림받아 극단적 선택에 내몰린 그녀의 한에서 소리의 정서를 끌어냈다는 것이다.

-서양의 분출하는 감정과 동양의 에두르는 감정은 다르지 않나.
“아들이 죽었다면 서양 엄마는 ‘아들이 그립다’고 말하지만, 동양 엄마는 ‘까치가 우니 귀한 손님이 오려나 보다’ 하면서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차이다. 표현방식만 다를 뿐 한은 같다. 메디아도 사실 참을 만큼 참았다 터뜨리는 거다. ‘인간이 참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인가’라는 대사도 있지만, 참으려 한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사회제도고 남편이고 권력이고 힘이다. 그 상황에서 모성을 가진 여자라면 운명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여자의 한은 다 비슷한 것 같다.”(한)
막장부부 이야기를 실제 부부가 만드는 것도 창극 ‘메디아’의 흥미로운 지점. 이들은 각각 메디아를 어떻게 해석할까. 서 연출은 “이아손이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고 말한다. 부와 명예가 있다 없어졌으니 다시 얻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 “왕이 부랑아로 추락해 천대받다가 다시 먹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유혹이 아니라 권리 아닌가 싶다. 차원이 다른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지옥일 것”이라는 의견에 한 작가는 “자식까지 버려가며 그래야겠느냐”며 맞선다.
“부부 사이는 사랑은 아니다. 결혼하고 자식을 낳으면 사랑은 없어지는데, 그 다음부터는 뭘로 사느냐, 그 단어를 오래 고민하다 ‘신의’라는 말을 찾아냈다. 하늘이 맺어준 거니까 의무보다 더 강한 신의라는 거다. 부부가 자식을 낳고 산다면 사랑은 변해도 신의를 저버리면 안 된다. 결혼을 잘 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도 같다(웃음).”

-창극 특유의 리듬이나 호흡은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우린 관점이 뚜렷하다. 레벨1로 봐달라. 프랑스 쌀국수는 우리나라 것보다 맛이 30배 세다. 그걸 먹다 한국 걸 먹으면 싱겁지만 거꾸로 레벨1을 먹어봐야 레벨10도 먹을 수 있다. 호흡·리듬도 중요하지만 현대 관객과 너무 멀다. 옛 호흡 그대로는 3분을 견디지 못한다. 조금 쉬운 방식부터 시작해 보라는 거다. 여기서 시작해 흥부가도 보고 점점 레벨을 높여가서 완창 판소리를 보면 그때는 자연스레 호흡·리듬 전달이 되겠지. 그렇게 유도해 간다는 사명감이 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흥부가만큼 재밌을 수 없다. 그러려면 나에게 4000번의 기회를 줘야 한다. 흥부가가 4000번쯤 공연했을 테니. 흥부가가 계속 다듬어져 왔듯이 우리도 수선해 나가면 지금 낯설게 보이는 메디아를 당연히 창극으로 인식할 날도 있을 거다.”(서)
“처음엔 메디아를 조선시대로 가져갈까 고민했었다. ‘여보시오 남정네들’로 시작해 343543이라는 기본장단도 살려봤다. 요즘 ‘돌직구’란 말이 유행인데 그건 너무 돌아가는 것 같더라. 창극에도 어차피 다양한 레퍼토리가 필요하다. 뮤지컬이나 오페라가 관객이 있는 건 다양한 레퍼토리가 있기 때문이고, 많이 만들어야 취향이란 게 생긴다. 창극은 취향을 갖기엔 너무 다 비슷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소리 듣기를 강조하고 내용은 뒷전으로 밀려 왔다. 그래서 그냥 가보기로 했다. 사투리, 발림, 팔자걸음도 다 배제했다.”(한)

-기본형식은 지켜야 하지 않나.
“현대 관객에게 접근하는 길을 택한 거다. 그런 게 있는 창극은 그대로 하고, 취향대로 봐야 한다. 뮤지컬 햄릿이 있는데 창극 햄릿이 있으면 왜 안 되느냐는 게 우리 신조다. 그래야 관객이 보러 오지 않겠나. 미래에 뭐가 더 긍정적이겠느냐 고민한 결과다.”(서)
“클래식이라는 말이 나오려면 훨씬 모던한 게 있어야 한다. 오페라보다 모던한 음악극 장르가 나왔기에 오페라를 클래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창극을 클래식이라고 하면서 이보다 모던한 게 없다. 가장 위험한 것이 관객 나이가 많다는 거다. ‘얼쑤’ 하고 추임새 넣어주고 장단, 호흡 아는 관객이 이제 얼마 안 된다. 대학에선 계속 가르치는데 그들이 관객을 만날 접점이 안 생기는 거다. 클래식이란 어쩔 수 없이 관객이 적어도 보존해야겠지만, 그래도 대중적 접점이 있어줘야 완창 판소리 하는 사람을 예인이라 높일 수 있을 거다. 지켜야 하는 것도 분명히 있다. 박진영씨가 얘기하는 ‘공기 반 소리 반’이 소리꾼 얘기다. 가수는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해도 소리꾼들은 다 이해한다. 성대를 다쳐서 굳은 살을 만든 목에서 강제로 소리가 나게 하는 세계 유일의 창법만은 지켜내면서, 가사를 알아듣고 현대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접점을 찾아준다면 클래식은 클래식대로 존중받을 수 있지 않을까.”(한)

호흡이 거칠어 오히려 맛있는 게 창극의 매력
불철주야 작품 고민 하느라 주말에 꽃구경 한번 가본 일 없고 마트에 가도 뭘 사야 될지 모른다는 이 부부는 서로를 ‘전우’라 부른다. 극단 물리의 연극 ‘서안화차’(2003)의 조연출과 예비작가로 처음 만났을 땐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며 끊임없이 싸웠지만 어느 순간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균형을 이루게 됐다. 이들의 작업이 실험적이면서 대중을 포섭하는 비결도 두 사람의 균형감각에 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걸 하자’는 서 연출의 형식적 실험을 한 작가의 대중적이고 쉬운 스토리로 중화시켜 이물감을 덜어내는 전략이다.
그렇다고 콤비로만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맘대로 하라면 관객을 물에 빠트려 놓고 공연하고 싶다”는 과격파 서 연출은 오페라 ‘아랑’, 댄스컬 ‘15분23초’ 등 독자적 실험을 이어가는 한편 한 작가는 뮤지컬 ‘영웅’ ‘윤동주, 달을 쏘다’ 등 보다 대중적인 작품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경험한 입장에서 창극만의 매력이라면?
“호흡이 거친 것이 오히려 맛있다. 악기도 한국 악기는 거칠다. 외국 악기처럼 부드럽지 않고 울림을 이용해 밀어붙인다. 창극의 호흡도 오페라처럼 매끈하거나 뮤지컬처럼 간질간질한 게 아니라 거칠어서 처음엔 불편한데,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매력적이다.”(서)
“외국인들은 소리를 소름 끼쳐 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공연전문가들은 전 세계 이런 발성을 가진 나라가 없다며 극찬한다. 다만 창극은 무대 테크닉이 지금껏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뒤처져 있다. 그래서 창극단이 다른 분야의 연출가들을 영입해 새로운 무대 메커니즘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한)
한 작가는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창극전문 작가, 연출가”라 주장한다. 창극에도 대표작가·연출가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연극과에 연출전공이 있듯이 전통극에도 연출전공이 있어야 한다는 것. “전통을 이어가는 소리꾼도 중요하지만 현대화를 위해선 전문적으로 작품을 끌어낼 창의력과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어려서부터 장르에 완전히 익숙하면서 연극·오페라·뮤지컬의 무대 테크닉까지 겸비한 연출가와 레퍼토리를 마련할 작가도 있어야 한다. 국악대상에 극작상·연출상·작곡상도 다 있어야 한다.”

-관객들이 새로운 창극을 어떻게 볼까.
“누군가 우리 공연을 보고 창극을 향한 꿈을 키울 만한 씨앗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공연은 논란이 되고 잊혀지겠지만 나중에 위대한 창극창작자가 나오기 위한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서)
“뮤지컬 초창기 때 롯데월드 예술극장에 거의 모든 유명 뮤지컬이 해적판으로 올랐다. 당시 익숙하지 않았기에 뮤지컬에 이물감을 느낀 사람도 많았지만 그걸 보고 자란 사람들이 오늘의 뮤지컬계를 만들었다. 창극 메디아도 이물감이 있겠지만 이걸 보고 재미를 느끼는 미래의 창작자·연희자가 오늘의 뮤지컬계 같은 창극계를 만들지 않겠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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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