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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이전에 여성 … 자기결정권 중시

“시대가 변했다.”

 대법원이 15일 부부 사이에 강간죄가 성립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43년간 유지돼온 판례를 바꾸며 내세운 이유다.

 기존 판례의 요지는 “정상적으로 부부관계가 유지되는 상태에서는 부부간 강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간죄는 ‘폭행이나 협박으로 부녀(婦女)를 간음’한 사람을 처벌하는 조항이다. 그런데 부녀에 부인(妻)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70년 대법원에서 확정된 이후 부부 강간죄 판단의 잣대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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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대법원의 판단은 법 제정 취지에 충실한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53년 제정된 형법은 비슷한 범죄를 유형별로 묶어 놓았는데 강간죄는 ‘정조에 관한 죄’에 포함됐다. 강간죄를 처벌함으로써 보호하려는 법익은 ‘여성의 정조’나 ‘성적 순결성’이라는 의미다. 특히 혼인관계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의무로 성관계가 포함된다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여성의 권리 인식이 높아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배우자 면책(marital exemtion)’ 이론의 원조 격인 영국과 미국도 1980년대 이후 잇따라 판례를 변경해 부부 강간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인식 변화가 법에 반영됐다. 95년 형법을 개정하면서 강간죄를 포함하는 범죄 유형을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꾼 것이다.

이건리 대검 공판송무부장은 지난달 열린 공개변론에서 “법을 바꾼 취지는 강간죄의 보호법익을 정조가 아닌 여성의 존엄성과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삼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도 결국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기로 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신영철 대법관)는 이날 부부강간죄로 기소돼 2심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은 A씨(45) 사건에서 “형법 개정은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과 법감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란희 여성의 전화 사무처장은 “놀라운 판결이 아닌 당연한 판결”이라며 “피해자가 부인이든 아니든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처벌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부부 사이에 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분명한 한계를 그었다.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아내를 간음한 경우”에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느냐에 대해선 “폭행에 이르게 된 경위, 평소 부부간 관계, 폭행 당시와 그 이후 사정을 종합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설명에 그쳤다.

 모호한 판결은 오·남용 가능성을 남겨 뒀다. 이혼 소송에서 여성 측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을 강간죄로 고소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란 우려다. 서석구 변호사는 “배우자가 성관계를 허락할 것으로 기대하고 행동한 남편의 행동이 모두 고소 대상이 된다면 형벌권을 남용하는 것인 만큼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굳이 처벌이 무거운 강간죄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가정이 재결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줘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상훈·김용덕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통해 “폭행과 협박이 수반됐다면 굳이 강간죄가 아니라도 다른 죄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성적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다. 재판부도 이 점을 고려해 “수사나 재판에서 모멸감·배신감 등으로 부부 사이의 심리적·정신적 상처가 덧나거나 혼인 파탄을 촉진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부부 강간은 가정폭력처벌특례법에 따라 처리할 수도 있는 만큼 특례법에 따른 보호처분이 적절한지, 형사처벌이 더 필요한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현철·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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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