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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부부간 강간죄 판결 가정의 달에 생각하는 성적 자기결정권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도대체 언제부터 형사들과 검사들이 내 아랫도리를 관리해온 거니. 국가보안법이면 몰라. 간통이 뭐야, 간통이.”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년)에서 유부남과 사귀다 간통죄로 걸린 강수연(호정)이 늘어놓는 푸념이다. 당시로서는 꽤 대담한 성(性) 담론을 펼친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대해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성 묘사의 빗장을 푼 한국 영화’라며 분석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처녀들의…’ 정도는 화젯거리에 끼지 못한다. 지난 15년 사이에 성 담론은 한층 분방해졌고, 인터넷에선 온갖 성적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날아다닌다.

 어제 대법원이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부부 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70년 판례가 43년 만에 바뀐 것이라 한다. 외형만 보자면 법원이 또 부부 침실 즉 남녀의 ‘아랫도리’에 개입한 셈인데, 내용을 뜯어보면 강수연의 푸념이 받아들여진 모양새다. 성적(性的) 자기결정권에 무게를 실었기 때문이다. 간통죄도 그동안 성인 남녀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존폐 논란이 많았고, 요즘은 폐지하자는 여론이 대세다. 부부간 강간죄 인정 역시 자기결정권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다.

 강간은 완력이나 권력 관계에 바탕을 둔 폭력행위라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진화생물학계에선 유전적 요인을 중시하는 학설도 제기된다. 2000년 미국에서 출간된 『강간의 자연사: 성적인 강압의 생물학적 기반』은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먼 옛날에는 강간이 인간의 환경적응력을 높여주는 행위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더 많은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강간도 불사했고, 이런 전략을 채택한 쪽이 자손 퍼뜨리기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학자·사회학자들의 반발이 거셌다. “번식이 목적이었다면 어린아이 강간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이냐”는 비아냥도 들었다.

 대체로 남성은 여성의 성적 욕구를 자기 편리한 대로 과대평가한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런 ‘착각’을 현대 남성들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여성의 욕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남성보다 짝짓기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그래서 나왔을까.

 그러나 진화론적으로 원시시대 인류가 어쨌든 간에, 우리는 말 그대로 ‘진화’를 거듭해 여기까지 왔다. 남의 생각과 권리를 무시하고 폭력으로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은 설령 부부 사이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가정의 달에 어울리는 획기적인 판단을 내렸다. 청와대 전 대변인의 어이없는 행각에도 성적 자기결정권 문제가 깔려 있다. 우리 사회가 이성의 몸과 권리에 대해 각자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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