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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콩가루 집안, 청와대

이철호
논설위원
윤창중씨 주연의 총천연색 저질 영화가 일주일째 상영 중이다. 미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한복을 입었는지 잊어버렸다. 관심은 오로지 윤씨가 속옷 차림이었는지, 아니면 알몸이었는지에 쏠린다. 청와대의 조사 내용과 윤씨의 해명을 합성하면 웃기는 장면이 된다. 알몸의 윤씨가 새벽에 호텔 룸으로 찾아온 21세 여성 인턴 앞에서 이렇게 호통친다. “여긴 왜 왔어? 빨리 가.”



 해외 로케이션 뮤비답게 고급 영어의 미묘한 어감 차이도 돋보인다. “허리를 툭툭 쳤다” 해서 처음에는 터치(touch)인 줄 알았다. 하지만 미국 경찰의 서류를 통해 grab(주물럭거리다)과 snatch(와락 움켜쥐다), 그리고 grope(더듬다)의 섬세한 차이까지 터득했다. 신체 부위도 그러하다. 여태 hip(둔부)만 알았지, buttock(엉덩이)이란 단어는 미처 몰랐다. 이런 영화가 시리즈로 나오면 굳이 토익을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을 듯싶다.



 우리 사회는 이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얼핏 짐작한다. 비슷한 줄거리의 국산 영화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윤씨는 “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성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우리 사회는 정반대로 인식한다. ‘그런 사람 모른다→돈은 오가지 않았다→의도나 대가성은 없었다’는 점층법을 구사하며 교도소로 간 정치인들을 숱하게 지켜봤다.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현도 강제 귀국을 의미하는 완곡한 반어법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기억이 안 난다”며 버티던 인물들을 지겹도록 기억한다.



 이제 청와대가 국민을 걱정하기보다 국민이 청와대를 걱정하는 이상한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윤씨는 청와대를 물고 늘어지며 물귀신 작전을 펴고, 청와대는 “노팬티였다”는 19금(禁) 진술서까지 흘리며 생매장시킬 기세다. 이런 콩가루 집안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마음은 조마조마하다. 언제 어디서 제2, 제3의 윤창중이 튀어나올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윤씨를 20년 넘게 지켜본 언론계는 그를 “언젠가 사고 칠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단지 예상보다 빨리, 그것도 사고 스케일이 워낙 컸다는 데 놀랄 뿐이다.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의 인사청문회 파동 때의 일이다. 사방에서 “임명하면 곤란하다”고 아우성이었지만 정작 청와대 관계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솔직히 윤 장관의 얼굴이 비호감이라서 과도하게 난도질당하는 느낌이다.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만큼 예쁘게 생겼으면 이렇게 억울하게 얻어맞았겠느냐”라고 반문했다. 청와대의 인식 수준이 한심하고 딱하다. 어쩌면 대통령 심기를 건드릴까 봐 윤씨 스캔들의 25시간 늑장 보고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홍보수석이 엉뚱하게 대통령에게 사과하는 장면도 그쪽 동네에선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싶다. 이 전 대통령은 광우병 촛불 사태 때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을 제치고 김두우 정무기획비서관을 집무실로 불렀다. “비서실장이 물러나야 하나, 아니면 국무총리를 퇴진시켜야 하나?” 김 비서관이 반문했다. “촛불 행렬이 정부 청사를 향했습니까, 아니면 청와대로 몰려왔습니까?” 이 전 대통령은 곧바로 류우익 비서실장 등을 대폭 물갈이했다. 2010년 강희락 경찰청장 경질 때도 마찬가지다. 이 전 대통령이 머뭇거리자 이동관 홍보수석이 총대를 멨다. 이 수석은 독대를 청해 “이러면 청와대를 홍보하기가 어렵다”며 대통령의 결심을 끌어냈다. 이명박의 청와대는 외부와의 불통(不通)이 문제였지 내부 소통은 무난한 편이었다.



 박 대통령은 충실한 돌직구 스타일이다. 사방에서 뭐라 해도 귀담아 듣지 않고 나홀로 인사를 고집했다. 그 결과 수첩에 적힌 7명의 총리와 장·차관 후보가 낙마하고, ‘1호 인사’ 윤씨는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다. 이제 박 대통령이 바뀔 차례가 아닌가 싶다. 직구에만 집착하면 얻어맞기 일쑤다. 가끔 변화구도 필요하다. 류현진 선수가 직구와 2~3종류의 변화구를 섞어 던지며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4승 고지를 밟지 않았는가.



 미국의 엘버트 허버드(Elbert Hubbard)가 쓴 『가르시아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는 1억 권이 넘게 팔린 책이다. 성경·마오쩌둥 어록·반지의 제왕에 이어 역사상 아홉 번째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다. 허버드는 여기에 “일반적인 능력보다 훨씬 진귀하고, 훨씬 뛰어나며, 훨씬 중요한 게 있다”고 썼다. 그 답을 “바로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는 윤씨의 저질 영화를 지켜보며 박 대통령의 ‘능력을 알아보는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 최고 통치자에겐 치명적인 상처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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