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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탐사] 대통령의 영어 연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했다. 그때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이 조는 모습이 카메라에 딱 걸렸다. 기자들이 추궁하자 그의 답변이 걸작이다. “누가 잤다고 그래요? 그분이 하도 영어를 잘해서 무슨 소린가 생각하느라 눈을 감고 있었던 겁니다.” 알아듣기 어려운 김 전 대통령의 영어 발음을 에둘러 꼬집은 거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달랐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어 하나하나 또박또박 발음하며 문장을 이어갔다. 그래선지 조는 사람도 없었고 박수도 많이 받았다. 현지 언론의 평도 좋은 편이다. 논란은 우리나라에서 일었다. 굳이 영어 연설을 했어야 하느냐는 말이다. 국가 지도자의 해외 연설 때 언어 선택은 상당히 미묘한 사안이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되지만 가장 앞서는 조건은 국가이익일 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금까지 공식석상에서 영어 연설을 한 게 딱 한 번인데 바로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유치를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 역시 영어로 연설해서 미 의원들의 호의를 얻었다면 탓할 게 못 된다. 게다가 2011년 이명박 전 대통령 이후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 외국 지도자가 바로 박 대통령이다. 이처럼 예외적인 대접을 받은 걸 생각하면 그 정도 서비스는 해줄 만도 했다.

 그런데 이익과 반대로 달리기 십상인 자존심이 늘 문제다. 언어적 자존심은 프랑스를 따라갈 나라가 없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2006년 유럽 정상회의장에서 자국 기업인이 영어 연설을 하는 데 격분해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정도다. 후임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도 2년 뒤 런던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할 때 프랑스어를 썼다. “영국 없이는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유럽을 건설할 수 없다”고 잔뜩 치켜세우는 연설인데도 그랬다.

 프랑스만큼 심하진 않지만 독일 역시 빳빳한 자존심을 자랑한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08년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홀로코스트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독일 총리가 이스라엘 의회에서 사과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의원들은 참석을 거부했다. 메르켈이 독일어로 연설한 까닭이다. 의원들은 “크네셋(이스라엘 의회)에서 독일어가 울려 퍼지는 건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에 대한 치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메르켈에게 영어 연설을 요구했으나 메르켈은 자국어를 고집했다. 처음과 마지막 인사말만을 히브리어로 했을 뿐이다. 메르켈이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었다. 모친이 영어교사였던 메르켈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영어로 연설했다면 훨씬 더 효과가 컸겠지만 국가적 자존심이 모국어까지 포기하며 사과해야 한다는 점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메르켈은 2009년 미 상·하원 합동연설도 독일어로 했다.

 사르코지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영국 언론들은 가수 출신 퍼스트레이디인 카를라 브루니에게만 관심을 가졌을 뿐 의도적으로 사르코지를 무시했다. “브루니만 동반하면 사르코지도 언제나 환영” “사르코지는 영국인의 관심을 끌려 했지만 영국인은 브루니를 사랑했다”는 신문 제목들이 달렸다. 영어 연설을 했더라면 이보다는 대접이 나았을지 모르지만 그게 자국어를 포기할 이유가 되진 않았다.

 박 대통령의 영어 연설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는 모양이다. 영어 잘하는 대통령보다 대한민국에 긍지를 가진 대통령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영어로 연설한다고 자긍심이 사라지랴마는, 이런 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말로 연설을 하는 게 나았을 듯싶다. 아직도 ‘반미’의 기억을 다 지우지 못하고 있는 이가 존재하는 걸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박 대통령이 5개 국어를 한다는 건 외국에까지 소문난 일이다. 외국 정상과의 대화나 귀빈 만찬에서 외국어 실력을 맘껏 발휘한다면 어느 나라 국민이라도 자랑스럽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외국의 국민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서의 공식 연설만큼은 우리 입장을 우리말로 설명하는 것이 더 당당해 보였을 터다. 그만큼 효과도 크지 않겠나. 기왕에 영어로 하기로 맘먹었다면 한복을 입고 의사당에 입장했으면 어땠을까. 화사하면서도 단아한 한복을 차려 입고, 유창하면서도 단호한 영어로 말했더라면 연설의 울림도 더 컸을 수 있다. 미 의원들의 박수 소리도 따라 커졌을 테고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부심이 한껏 부풀 것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여러 벌 준비한 고운 한복을 우리 동포들 만나는 자리에서만 입은 이유는 지금도 궁금증으로 남는 대목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국제부장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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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