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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장 보고, 늑장 공개, 귀국 방치 … 예고된 참사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이 10일 밤 춘추관에서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사건은 청와대 내부의 기강 해이, 책임의식 부재, 위기 관리 능력과 시스템 부실을 총체적으로 드러냈다. 윤 전 대변인과 청와대 사이에 자중지란식 진실게임까지 벌어지면서 일각에선 “터질 게 마침내 터진 것”이란 말까지 나온다.

이번 사건 전부터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내부 갈등으로 사실상 제 기능을 못해왔다. 윤전 대변인과 김행 대변인은 사사건건 역할 분담을 놓고 충돌했고, 이번 방미를 앞두고선 ‘내가 가겠다’고 다퉜다고 한다. 상급자인 이남기 홍보수석조차 한때 “둘 다 미국에 가라”고 할 정도로 내부 갈등을 조율하지 못했다.

윤 전 대변인과 이 수석은 평소 기자들의 전화도 잘 받지 않아 ‘불통’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급박한 일정이 이어지는 방미 기간 중 윤 전 대변인이 본연의 업무에 따라 기자들과 접촉하는 대신 현지 여성 인턴과 술 마실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평상시 업무 태도와 무관치 않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직인수위 시절부터 유명했던 윤 전 대변인의 ‘튀는 행동’은 청와대에서도 여전했다. 그는 “청와대 대변인의 월급과 판공비가 적다”면서 연봉 명세서를 기자들에게 공개하겠다고 한 일이 있었다. 김행 대변인에게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고용하려는데 비용을 반씩 부담하고 같이 돈을 내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이런 사연이 있는 윤 전 대변인은 11일 기자회견에서 “이남기 수석이 ‘재수가 없게 됐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원색적으로 폭로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청와대보다 자기 개인을 우선시하는 면모를 보인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윤 전 대변인은 귀국 후 곽상도 민정수석에게 해명할 때만 해도 (성추행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들었는데, 기자회견에선 어떻게든 자신이 살기 위해 완전히 오리발을 내밀고 청와대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주장했다.

피해 여성 대신 대통령에게 사과?
성추행 의혹 사건이 터진 뒤 청와대 인사들이 보여준 대처 방식도 상식 이하였다. 여성 인턴이 워싱턴 경찰에 성추행 피해를 신고한 8일 오전 8시(미국 동부시간) 전후, 현지에 있던 홍보수석실 전광삼 선임행정관도 해당 사건을 인지했다. 전 행정관이 윤 전 대변인과 통화한 뒤 오전 9시40분쯤 이남기 수석에게 첫 보고를 했다는 게 청와대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윤 전 대변인이 황급히 귀국한 배경에 대해선 윤 전 대변인과 이 수석의 말이 엇갈린다. 청와대가 사건 인지 후 정확한 상황 파악과 수습에 나서는 대신 윤 전 대변인의 귀국을 방치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가릴 수 있다”며 사건을 숨기는 데만 골몰하다 제대로 대처할 타이밍을 놓친 셈이다. 청와대 측은 이후에도 기자들에게 “윤 전 대변인이 워싱턴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전화를 걸어왔다. ‘집안에 일이 생겨서 간다’고 했다”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해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윤 전 대변인의 주장대로 이 수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국내도피를 종용했다면 ‘청와대가 범죄 혐의자를 도피시키는 데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 수석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점도 논란이다. 이 수석은 10일 기자회견에서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번 사건의 내용을 파악한 직후 대통령께 보고드렸고, 그 즉시 조치를 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선 “이 수석이 사건을 처음 접한 8일 오전 9시40분으로부터 26시간이 지난 뒤 로스앤젤레스(LA)에서 관련 보고를 했다” “대통령께 아무 때나 불쑥불쑥 들어가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사건이 발생한 지 38시간 뒤 보고했다”는 등 엇갈리는 얘기가 나왔다. 분명한 건 박 대통령이 워싱턴에서 LA까지 가는 5시간의 비행시간 중 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격을 추락시키고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중대 사안임에도 보고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쪽에선 “평소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 보고를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를 방증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보고 이후 대처도 부적절했다. 10일 박 대통령의 귀국에 앞서 청와대에선 허태열 비서실장 주재로 대책회의가 열렸다. 대통령이나 비서실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거나 추가 인책을 하는 다양한 수습 방안이 검토됐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이 귀국한 지 세 시간이 넘은 뒤인 이날 밤 10시40분에야 이 수석이 사과에 나섰다. 국민들이 내용을 접하기 힘든 한밤중에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공식 사과문은 네 문장에 불과했다. 특히 이 수석은 “국민 여러분과 대통령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국민과 대통령을 같은 위치에 넣고 사과했다. 피해 여성에 대한 사과도 없이 오히려 ‘대통령’에게 사과한 건 청와대의 경직된 분위기를 보여준다는 평이다.

민주당 “국격 추락 청문회 추진”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은 “피해 여성과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에게 사과한 건 청와대가 대통령 개인을 시중드는 내시부(內侍府)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참담한 상징”이라고 비판했다. 그뿐 아니다. 이런 비판이 나온 뒤인 11일에도 윤 전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국민과 함께 대통령을 향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11일 오전 윤 전 대변인의 기자회견 뒤에도 청와대는 우왕좌왕했다. 내부 회의를 거듭했지만 정식 조사 내용을 밝히거나 사과하는 대신 오후 5시40분에야 이 수석과 전광삼 행정관이 기자실을 찾아 윤 전 대변인의 주장을 반박하고 해명하는 데 그쳤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관련 조사를 끝낸 상황임에도 전 행정관 등은 “민정수석실에서 조사한 거고 우리는 피조사자”라며 조사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이 수석은 자신이 사퇴해야 한다는 여론과 관련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책임을 지겠다”면서도 늑장 보고와 거짓 해명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했다.

향후 ‘윤창중 정국’은 요동칠 전망이다. 민주당은 “‘국격 추락 청문회’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15일 새 원내대표단을 선출할 예정이어서 양측의 신임 원내대표단이 출범 직후부터 청문회 개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할 가능성이 크다. 익명을 요구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청문회를 거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문제라 비호하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박 대통령이 직접 사과해야 한다’는 여론도 잦아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윤 전 대변인 임명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지만 박 대통령이 강행한 ‘나홀로 인사’여서다. 민주당 이언주 원내대변인은 “윤 전 대변인은 전 국민이 노(no)라고 할 때, 박 대통령이 나 홀로 예스(yes)를 외치며 임명한 인물”이라며 “박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으로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하락세로 돌아섰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한·미 정상회담으로 박 대통령의 일일 지지율이 9일 58.4%까지 상승해 60%를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10일 조사 결과 56.7%로 1.7%포인트 빠졌다”며 “이틀(9, 10일)간의 여론조사를 합산한 거라 윤 전 대변인 사건에 대한 여론이 일부만 반영돼 앞으로 더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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