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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민주당, 아직도 DJ가 그리운가

이하경
논설실장
1986년. 전두환 정권은 임기 말을 향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0일 오전 신민당 김영삼(YS) 고문의 승용차 뒷자리에 탔다. 목적지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YS는 단단히 작심한 듯 이민우 신민당 총재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자기와 김대중(DJ)을 대리해 당을 맡겨놓았는데 같이 정치를 못하겠다고 비난했다. “미스터 리, 너무 힘들어”라고도 했다. 갈등의 불씨는 ‘고용 사장’ 처지를 잊었던 이 총재의 독자 행보였다. 마침내 그해 12월 24일 이 총재는 정부·여당이 지방자치제 실시와 언론자유 보장 등 7개 항의 민주화 조치를 선행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한다. 양김은 반발했다. 1987년 3월 12일 아침 각기 다른 장소에서 상도동과 동교동계 의원 전원을 소집해 지지서명을 받았다. 5월 1일에는 계보 의원들을 이끌고 탈당해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체제의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전두환 정권의 타협안을 거부하고 직선제 개헌이라는 승부수를 던져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양김 정치의 백미(白眉)였다.



 지금 민주당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김한길 대표 체제를 출범시켰지만 앞날은 불투명하다. 김 대표는 “민주당의 영혼만 빼고 모든 것을 버려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했다. 계파주의 청산과 포퓰리즘, 교조주의, 무책임의 극복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대로 당이 굴러갈지는 의문이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집권에 성공한 YS·DJ의 초인적 리더십은 더 이상 민주당에 존재하지 않는다. DJ와 노무현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진보·개혁세력의 비교우위도 사라진 지 오래다. 권위주의 시절의 야당은 도덕적 정당성 하나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지긋지긋한 독재의 장막이 걷히자 상황은 달라졌다. 무수한 이해관계와 갈등이 난수표처럼 펼쳐진 세계가 등장했다. 정의와 불의의 선악구도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고차방정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원했던 민주화가 되자 민주세력이 힘들어지는 역설이 현실화된 것이다.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예상을 깨고 민주당이 패배한 것은 한국 정치가 더 이상 도덕과 명분의 영역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민주당은 진보정당과 손잡고 개혁성을 내세웠지만 유권자들은 구호보다는 실천할 능력과 진지함이 있는지를 따졌다. 그 결과 견제할 정도의 힘만 주었을 뿐, 집권의 기회는 부여하지 않았다.



 정치지형도 민주당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강 1호이면서 정체성을 이루는 경제민주화, 복지 이슈를 선점했다. 도덕적 우월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당의 추상적·급진적 공약은 먹히지 않았다. 박근혜의 이슈는 공약(空約)으로 변질되지 않고, 새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추진되고 있다. 지금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차별성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이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해 진정성이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보수정권인 박근혜정부가 진보·개혁적 과제를 성공적으로 풀어낸다면 민주당의 설 자리는 더 좁아질 것이다.



 4·24 재·보선을 통해 원내에 진입한 안철수의 존재도 위협적이다. 그가 지난 3월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이었다. 최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나빠진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이 학생운동 출신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된 것에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어떤 실체적 혜택을 주었고, 이들을 위한 정치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무엇을 기여했는가를 묻고 싶다고 했다. 민주 개혁을 표방한 DJ·노무현 정권 10년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민생이 악화된 역설도 그가 끊임없이 제기해 온 문제다. 그렇다면 안철수는 학생운동권 출신의 486세력이 중심이었던 민주당의 약점을 파고들 것이다. 그에게는 민주당이 선의의 보완재가 아니라 개혁과 극복의 대상일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안철수 정치의 생존공식이기 때문이다.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보수 정당 새누리당이 진보·개혁 영역을 넘보고, 안철수의 ‘새 정치’는 언제든 치명적 무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은 YS·DJ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통하는 시대도 아니다. 결국 민주당은 현실과 유리된 이념 과잉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민심과 만날 수 있다. 그래야 치열한 모색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의 중심을 세우고 균형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민주당은 오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에서 비판적 어젠다를 선도적으로 제기해 온 정치집단이다. 최악의 상황을 이겨내고 두 차례나 집권한 경험도 있다. 민주당의 재기는 여야 정당 간의 합리적인 경쟁구도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다.



이하경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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