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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성적? 역시 학벌이 최고야"

권석천
논설위원
합격 여부만 알려 주고 성적은 비밀에 부치는 시험. 불합격하지 않는 한 응시자 본인도 자기 점수를 알 수 없는 시험. 세상에 이런 시험이 있을까. 있다. 그것도 대한민국에. 바로 변호사 자격을 주는 변호사시험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게 정말이냐”고 물을 사람도 적지 않을 터. 변호사시험법 제18조 1항을 보라. ‘시험 성적은 응시자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아니한다. 다만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은 본인의 성적 공개를 법무부에 청구할 수 있다’. 2011년 법 개정을 통해 이 조항을 집어넣은 이유는? “성적 공개에 따른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서열화와 과다 경쟁을 막기 위해서”다. 당시 법무부는 “성적을 알려 주면 학생들이 시험에만 매달릴 수 있다”며 법 개정에 찬성했다.



 그 선량한 취지는 현실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지난 16일 서울변호사회가 발표한 통계 자료를 보자. 지난해 법무부가 검사로 임용한 로스쿨 1기 졸업자 중 85.7%가 SKY대, 즉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었다. 2010~2012년 임용된 사법시험 출신 검사 중 SKY대 비율(64%)과 비교하면 학벌 서열화가 오히려 심해졌다. 김앤장·태평양·광장 등 상위 6개 로펌에서도 로스쿨 출신 변호사의 81%가 SKY대 로스쿨 졸업자다. 대학이든, 로스쿨이든 SKY 브랜드를 걸쳐야 검사나 대형로펌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많은 법조인은 “시험 성적이 감춰지면서 출신 대학이 주된 잣대가 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거엔 사시와 사법연수원 성적에 따라 판검사로 임용되고 대형로펌에 들어갔다. 어느 대학을 나오든 한두 차례 역전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대학 입학 때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셈이다. 그 결과 학벌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 공고해지고 있다. 2009~2012년 수도권 로스쿨 입학생 중 지방대 출신은 겨우 2.3%다. 이호선 국민대 법대 교수의 설명이다.



 “2009년 사시에서 부산대는 28명, 전남대는 26명, 경북대는 22명의 법조인을 배출했어요. 하지만 최근 4년간 수도권 로스쿨에 입학한 해당 대학 졸업자는 부산대 13명, 전남대 14명, 경북대 6명에 불과합니다. 다양성을 확보하겠다는 로스쿨 도입 취지와 달리 지방대 출신의 법조 진출은 사실상 봉쇄되고 있는 거죠.”



 일부 로스쿨에선 엑소더스(탈출)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 수도권 로스쿨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1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 40%가 로스쿨 입학에 필요한 리트(LEET·법학적성시험)에 다시 응시했기 때문이다. 교수들까지 나서 학생들을 주저앉혔지만 결국 두 명은 다른 로스쿨로 옮겨 갔다.



 그렇다면 성적 비공개 자체는 옳은 것일까. 바른 방향이라면 부작용을 감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결론은 ‘아니요’에 가깝다. 실력을 객관적 지표로 보여 줄 수 있는 건 시험 성적밖에 없다. “로스쿨이 변호사시험 학원이 돼선 안 되지 않느냐”는 주장에 일리가 있지만 시험 공부도 공부다. 시험이란 과정을 통해 지식을 집중적으로 습득하고 평가받는 측면을 무시해선 안 된다.



 김용섭 전북대 로스쿨 교수는 “의사자격시험은 물론 운전면허시험도 성적을 알려 주지 않나. 미국, 독일, 일본, 어디에도 법조인 자격시험 성적을 알려 주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말한다. 성적표가 사라진 ‘깜깜이 취업’ 속에 지방대 출신은 시험 성적이 좋아도 눈물을 삼킨다. 로스쿨 주변에선 “아버지가 법조인이나 고위 공직자 정도는 돼야 한다”는 자조가 오간다. 더 큰 문제는 결과에 누구도 승복하지 못하는 구조가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실력은 성적순이다. 패자가 실력이 아니라 학벌 탓, 제도 탓, 부모 탓을 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법조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이 갑갑할 뿐이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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