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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김정은, 박근혜를 잘못 봤다"

이철호
논설위원
삼성그룹은 해외에 공장을 지을 때 바이블처럼 받드는 두툼한 매뉴얼이 있다. 입지와 임금 수준은 물론 주재원 가족이 이용할 학교와 병원까지 500여 개 항목을 체크한다. 심지어 토질과 지하수맥의 방향까지 따진다. 자칫 환경 오염으로 낭패를 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잣대로 보면 개성공단은 정말 순진한 투자다. 오로지 ‘남북 화해’만 강조됐고, 막연히 북한의 선의(善意)에만 의존했다. 북한은 “우리의 최고 존엄을 모독했다”는 지극히 주관적 이유로 통행을 막았다.



 키움자산운용의 윤수영 대표는 “국제 금융은 기본적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고 했다. 해외 투자는 채권추심 능력과 비례한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돈이 떼일 조짐이 보이면 국제 신용평가업체들이 그 나라의 신용등급을 마구 낮춘다. 그래도 안 먹히면 국제 소송을 건다. 마지막에는 어떤 구실을 잡아서도 항공모함을 보낸다. 이에 비해 우리는 개성공단을 막아도 아무런 채권추심 수단이 없었다. 그냥 눈 뜨고 지켜볼 따름이다. 남북관계의 현주소이자 서글픈 자화상이다.



 순수한 경제적 측면에서 개성공단의 의미는 한 달 전 북한의 통행금지로 사실상 증발됐다. 대화 제의-북한 거부-철수 명령은 명분을 차지하기 위한 잔불 정리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기업은 신용으로 먹고 산다. 촘촘하게 짜인 공급망에 어느 한쪽이 차질을 빚어도 전체가 무너진다. 2년 전 일본 혼다자동차는 태국 홍수로 현지 공장이 물에 잠겼다. 몇 개의 사소한 부품 공급이 중단되자 전 세계 혼다 공장들이 6개월간 몸살을 앓았다. 천재지변도 이럴진대 최고 영도자의 기분에 따라 문을 여닫는 곳에 더 이상 투자할 강심장은 없다.



 그동안 북한 김정은 제1비서는 미치광이 전략(madman strategy)을 한껏 구사했다. 핵 강대국들끼리 “우리가 미칠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야 적들이 겁에 질려 우리의 요구에 순응한다”는 냉전시대의 논리다. 이 전략에 따라 북한은 인공위성을 쏘고 3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추가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카드도 공언했다. 하지만 별로 남는 장사로 보이지 않는다. 미치광이 전략에 필요한 공포감과 긴장, 의심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 보스턴 테러로 국제적 관심이 돌아서버렸다. 서울에 와 바람을 잡던 외신 기자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중국 역시 예전처럼 살가운 이웃은 아니다. 유엔 제재에 맞춰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 가장 괘씸한 것은 남한일지 모른다. 그동안 남한은 알아서 기었다. 북한이 주먹을 휘두르면 어김없이 남·남 갈등이 일어났다. 그렇게 “전쟁하자는 거냐”고 아우성쳤던 남한이 싹 변했다. 우선 겁먹은 분위기가 아니다. 북한의 말 폭탄보다 류현진의 피칭과 싸이의 신곡에 더 열광한다. 북한이 손에 쥔 패도 대충 눈치 채버렸다. 핵무기는 쏘기 어렵고, 중국의 지원 없이 전면전은 불가능하며, 이번 사태는 권력 강화를 위한 내부용이란 관측이 넘쳐났다. 그동안 장사정포 위협과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충분한 내성이 생겼는지 모른다.



 북한의 가장 큰 패착은 박근혜 대통령을 잘못 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시한을 못박아 대화를 압박했고, 이튿날 개성공단 철수를 지시했다. 이런 건 원래 북한의 주특기였다. 북한은 박 대통령이 타고난 승부사라는 점을 잊은 모양이다. 박 대통령은 라디오 사회자가 자꾸 캐물으면 “저하고 싸우자는 거예요?”라며 돌직구를 날리고, 새누리당 공천 잡음 때는 “더 이상 토 달지 마세요”라며 제압한 인물이다. 솔직히 요즘은 북의 핵무기보다 박 대통령의 ‘레이저 광선’이 더 무서운 게 남쪽의 분위기다. 그런 박 대통령이 북한의 악수(惡手)로 꽃놀이패를 쥐었다. 인사 참사로 떨어진 지지율이 다시 50%로 치고 올라왔다. 오죽하면 청와대 주변에서 “친박보다 북한이 훨씬 낫다”는 말이 퍼질까.



 이제 개성공단은 치명상을 입었다. 설사 남북 대화로 정상화된다손 쳐도 완전한 원상복구는 불가능하다. 개성공단에서 승용차 지붕까지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철수하는 사진은 매우 불편한 장면이다. 두고두고 씻기 어려운 상처로 남을 것이다. 한번 혼이 난 입주업체들마저 언제 출구전략을 밟을지 모른다. 참고로, 남한에서 신용등급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아무리 기를 써도 평균 4.3개월이 걸린다. 하지만 카드 대금을 일주일만 연체해도 신용등급이 4단계나 떨어진다. 북한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런 소중한 신뢰를 내팽개쳤다. 남쪽에는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신용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는 말이 있다. “인민들이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김 제1비서가 참고했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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