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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가 한 대뿐인 생가 마을 단골로 묵다 여생 마친 호텔 …

이탈리아 북부 부세토시 베르디 광장에 있는 베르디 동상.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탄생 200주년인 올해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기념 행사가 촘촘하다.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은 2월 13일 상연된 ‘나부코’ 공연을 국영방송 RAI 5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했다. 또 밀라노·파르마·부세토·크레모나 등 베르디의 삶과 관련된 도시들은 올여름부터 베르디의 생일인 10월까지 각종 연주회와 행사를 마련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베르디를 유독 사랑한다. 독립의 상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베르디가 청년 작곡가였던 시절 이탈리아에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염원이 타올랐다. 베르디는 ‘나부코’‘에느나니’ 등을 통해 당시 식민지 상황을 예술적 오페라로 표현했다. 특히 오페라 ‘나부코’에 삽입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Va Pensiero)’을 이탈리아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압제하에 있던 자신들의 처지를 나타낸 곡이라 생각해 국가처럼 따라 불렀다.
그의 오페라가 끝나면 사람들은 “베르디 만세(VIVA VERDI!)”를 외쳤다. 이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이탈리아 왕(Vittorio Emmanele Re D’Italia)의 이니셜로서 베르디(VERDI)라는 이름과 같았기에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아 평소 방문하기 힘든 장소들이 공개됐다.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1 론콜레(Roncole) 마을 성당 안에 있는 베르디가 치던 피아노. 2 베르디 생가의 식당. 3 베르디 생가 전경.
생가와 어릴 적 치던 오르간은 국보로
1813년 10월 10일 주세페 베르디가 태어난 마을 론콜레(Roncole)는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 주 파르마 시의 위성도시인 부세토에서 남동쪽으로 5㎞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이 작아서 그런지 내비게이터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주변 위치만 줬다.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부세토에서 내려 택시를 타야 하는데, 부세토에 딱 한 대밖에 없는 택시가 고장이 나든가 다른 승객을 태우고 먼 곳으로 출장 갔다면 베르디 생가 방문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다.
‘낫’이라는 뜻을 가진 론콜레는 농부 가족들이 모여 살던 소박하고 작은 마을이었다. 주세페 베르디는 피아첸자에서 이사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가에서는 30분에 한 번씩 방문객을 위한 가이드 투어가 있었다. 마당에는 탄생 100주년 때 설치된 흉상이 관람객을 맞았다.
17세기에 지은 베르디 생가는 이탈리아의 여느 농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베르디의 부모는 집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했기 때문에 집은 항상 사람으로 북적거렸고 앞마당은 각종 잔치를 여는 데 사용되곤 했다.
2층에는 베르디가 태어난 방과 어릴 적 사용하던 방이 있다. 부모의 방에는 그가 생전에 작곡했던 곡들이 연도별로 적힌 액자와 세례 증명서가 담긴 액자가 보였다. 헛간을 향해 난 창문 있는 방이 베르디와 그의 동생 방이다. 베르디는 다운증후군 환자였던 여동생과 이 방에서 피아노를 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문 너머로 베르디가 영세를 받은 작은 성당이 보였다. 베르디는 열 살 때부터 이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는데 이 오르간은 이탈리아의 국보다. 중학교는 부세토에서 다녔기 때문에 매일 먼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현재 이 집은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마을 이름도 1963년부터 론콜레 베르디로 바꿔 베르디를 기리고 있다.

밀라노 그랜드 호텔 옆길에 짚을 깐 이유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만조니 길을 따라 왼쪽으로 200m 정도 걸어 돌로 만든 현판이 붙어있는 그랜드 호텔 밀란에 도착했다. 현판에는 당시의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호텔에는 1901년 1월 27일 서거한 귀중한 투숙객 주세페 베르디에 대한 추억이 담겨 있다. 이 현판은 천상의 하모니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안겨 준 마에스트로 주세페 베르디의 서거 1주년을 기념해 밀라노시가 모든 시민의 한결같은 추모의 정을 담아 설치했다.”
평소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특별히 이 방에 묵기를 원하는 고객에게만 비싼 값에 대여되는 주세페 베르디의 방이 특별 공개됐다. 이탈리아 환경재단 FAI(Fondo Ambiente Italiano)의 주관으로 연회비를 내고 재단에 등록한 사람들에 한해 입장이 허가됐다. 비가 오는 날이었음에도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1863년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그랜드 호텔 밀란은 규모가 작았음에도 19세기 말부터 드물게 전보와 우편 서비스를 취급했기 때문에 사업가들과 외교관들이 많이 이용했다. 베르디는 오페라 ‘아이다’가 초연된 다음 해인 1872년 이 호텔 2층 105호실에 묵으며 단골이 됐다.
가이드를 따라 올라간 2층 105호실은 거실과 세 개의 방, 두 개의 발코니가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따뜻한 붉은 색의 커튼과 카펫은 황금색 장식과 어울려 고급스러운 왕실의 느낌을 자아냈다. 벽에는 베르디 그림이 걸려 있고 맞은편에 벽난로가 있었다. 베르디는 이 방에 묵으며 대본작가 아리고 보이토나 악보 출판사 사장 리코르디와 함께 작품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오후 5시면 호텔 로비에 내려와 피아노를 쳤고 산책을 했으며 방의 벽난로 옆에서 일곱 가지 코스로 마무리되는 저녁식사를 한 후 다시 로비에 내려가 카드놀이를 했다.
베르디가 작곡할 때 사용했던 검은색 나무책상에 잠시 앉아보았다. 문득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 마음아 황금빛 날개로 / 언덕 위에 날아가 앉아라 / 아름답고 정다운 내 고향 / 산들바람 불어주는 내 고향….”
1887년 베르디는 ‘오델로’로 라 스칼라 무대에 다시 돌아왔다. ‘오델로’에 열광한 밀라노 시민들은 베르디가 탄 마차를 따라 그랜드 호텔까지 행진했다. 당시 라스칼라에서 열린 오페라가 성공하면 공연 후 작곡가를 따라 거리를 행진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날 밀라노 시민들은 베르디가 탄 마차를 어깨에 이고 거리를 행진했는데 어찌나 사람이 많았는지 2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호텔에 도착하는 데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아내 주세피나를 잃은 지 4년 후인 1901년 1월 27일 밤 오랜 혼수상태 후에 베르디는 밀라노 그랜드 호텔 방에서 일생을 마쳤다. 호텔 옆 돌길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의 소음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한 밀라노 시민들은 길바닥에 밀짚을 깔았다. 베르디가 사망한 다음날까지도 그랜드 호텔 주변은 수천 단의 밀짚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랜드 호텔은 전 세계에 베르디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를 쳤고 호텔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베르디를 애도하며 몰려들었다.
베르디의 장례식은 그의 유언대로 새벽에 치러졌다. 시신은 밀라노 기념묘지의 부인 주세피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한 달 만인 2월 27일 두 부부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베르디가 밀라노에 지은 '음악가를 위한 휴식의 집'으로 옮겨졌다.

8 베르디가 밀라노에 지은 음악가들을 위한 요양원 뜰에 있는 베르디 동상. 9, 10 음악가들을 위한 요양원 전경과 강당.
음악가를 위한 휴식의 집 남기고…
1896년 베르디는 밀라노 부오나로티 광장 29번지에 음악가들을 위한 휴식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대본작가 아리고 보이토의 형제였던 건축가 카밀로 보이토가 설계한 이 집은 네오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내가 만든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운이 없어 성공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었거나 젊어서 돈을 모으지 못한 성악가와 음악가들을 위해 밀라노에 지은 휴식의 집”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이 집에 애착을 보였다.
건물은 1899년 완성됐지만 그는 우쭐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죽기 전에 어떤 음악인도 입실을 허락하지 않았다. 베르디 사망 1년이 지난 1902년 10월 10일 음악가들을 위한 휴식의 집은 드디어 문을 열었다. 베르디의 소박한 스타일을 존중해 아무 행사 없이 개원했으며 남자 5명, 여자 4명이 입주했다. 현재까지 약 1000명의 음악인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현재는 75명이 묵고 있다.

11 휴식의 집 입구에 장식된 베르디 부조. 그가 작곡한 오페라 제목이 연도 순으로 적혀 있다. 12 휴식의 집 응접실. 지휘봉과 훈장, 월계관 등을 넣어둔 장식장이 보인다. 13 베르디가 어린 시절 치던 피아노.
이 휴식의 집 역시 FAI의 주관으로 이번에 공개됐다. 베르디의 묘지는 방문할 수 있었지만 건물 내부 공개는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랜드 호텔과는 달리 FAI에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도 입장할 수 있어 줄은 매우 길었다. 약 10명이 한 조가 되어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차례차례 입장했다.
입구에는 동으로 제작한 베르디의 실루엣 부조가 박혀 있었다. 좌우로 그가 작곡한 모든 오페라가 연도별로 적혀 있었다. 앞의 복도 끝에는 양 옆으로 응접실 두 개가 있는데 한 방에는 생전에 받은 훈장이나 지휘봉 등이 진열된 전시장이 있고 다른 방에는 데드마스크와 사후에 바로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베르디가 어린 시절 동생과 함께 치던 낡고 작은 피아노도 있었다.
집을 짓는 데 사용된 서류와 베르디의 친서가 보관된 자료실을 둘러본 후 2층으로 올라갔다. 넓은 강당 중앙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이 집에 머무는 한 나이 많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고 있었다. 음악은 이곳뿐 아니라 휴식의 집 어디서나 울려 퍼졌다. 음악은 베르디에게 그랬듯이 이들에게도 삶의 전부이자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숨소리였다.
강당 옆 방에는 베르디가 사용하던 악기와 가구, 개인용품을 모아놓았다. 카이로 오페라 극장에서 올려진 오페라 ‘아이다’의 성공 이후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가 선물로 보낸 가구 2점과 토스카니니가 20대 초반이었던 1898년 연주했던 에라드 피아노가 함께 전시돼 있다. 방 뒤에 있는 음악홀은 약 2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연주회가 열린다. 라 스칼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도 1년에 한 번은 이곳에서 연주한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베르디와 아내 주세피나가 잠든 지하 경당(크립타)을 방문했다. 안뜰을 가로질러 맞은편에 따로 지은 건물 지하에 안장된 베르디 부부의 묘는 밀라노 두오모 성당 문을 제작한 로도비코 폴리아기가 제작했고 베네치아 무라노 회사가 모자이크로 벽을 장식했다. 베르디 부부와 친구이자 베르디의 연인이라는 기묘한 사이였던 테레자 스톨츠는 두 부부가 안장된 크립타의 마감 작업을 감독했으며 크립타는 1903년 3월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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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