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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만지면 뻔한 가짜도 진짜가 된다

내용보다 무대로 기억되는 공연이 있다. 경사진 2중 회전무대가 교차하며 조선 왕실의 비극적 운명을 그렸던 뮤지컬 ‘명성황후’, 달리는 기차의 영상과 실물이 절묘하게 교차하던 뮤지컬 ‘영웅’, 덕수궁 돌담길이 악보로 변하던 뮤지컬 ‘광화문연가’, 경복궁 경회루로 무대를 옮긴 연극 ‘리어왕’…. 객석을 압도하는 무대 디자인에 프로그램을 들춰보면 십중팔구 같은 이름을 마주하게 된다. 무대미술가 박동우(51).

공연스태프로서는 전무후무하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했고,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을 뉴욕에 가져가 “진정한 스펙터클이 뭔지 보여준다”는 현지 언론의 극찬을 받은 ‘국가대표 무대미술가’다. 창조적인 무대미술로 우리 창작극의 발전을 지탱하고있는 듬직한 존재다. 사계절의 자연이 투영된 한 폭의 수묵 담채화가 무대를 품었던 창극 ‘서편제’, 파편화된 기억의 장막 속에 비밀을 꽁꽁 묶어 놓았던 뮤지컬 ‘그날들’ 등 최근에도 공연 뒷배경에 머물지 않고 자기 주장을 하는 개성적인 무대를 연이어 선보이고 있는 그를 그의 서초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4월 초 개막한 뮤지컬 ‘그날들’은 소극장 뮤지컬의 신화 ‘김종욱 찾기’의 장유정 연출이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오랜만에 만나는 창작뮤지컬 대작. 개막전엔 의문이었다. 김광석의 잔잔한 노래를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드라마가 과연 대극장의 스케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관건은 무대와의 조화였다. 수천 가닥으로 겹겹이 중첩된 실 커튼을 스크린 삼아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킨 박동우의 무대는 자칫 디테일에 치우치기 쉬운 미스터리물을 신비로운 분위기로 감싸 성공적으로 대극장에 안착시켰다.

-베일에 싸인 듯한 무대가 독특했다. 어떤 점에 주력했나.
“과거와 현재의 사건들이 중첩된 이미지들을 투명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김광석이 부른 노래의 분위기도 살리려 했다. 특히 영화만큼 많은 장면으로 이뤄진 작품이라 무대에서 50여 개의 장면을 어떻게 매끄럽게 구현할 수 있을까가 가장 큰 화두였다.”

-미스터리와 휴먼드라마가 교차하는 독특한 스타일에서 오는 어려움은 없었나.
“보통 창작 초연에서는 무대를 구현할 때 대본에 나온 장소를 바꾸거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넣기도 한다. 예컨대 ‘영웅’에서 기차가 달려오는 장면은 대본에 없었지만 무대미술상 필요에 의해 만들어 넣은 거다. 그런데 미스터리는 그럴 수 없더라. 조금만 설정을 바꿔도 미스터리가 성립되지 않으니까.”

-무대 디자인에 ‘우리가 지금 이 작품을 왜 하는가’하는 질문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번 작품은 어떤 대답을 구했나.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사는 작가가 쓴 창작 초연에선 문제가 없다. 단지 코스프레 같은 작품에 비판적이다. 예컨대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국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 영국의 성을 만들어놓고 머리에 가발을 쓰고 서양풍의 대사와 몸짓을 하는 걸 나는 ‘코스프레’라고 부른다. 왜 지금 이 작품이 필요한지 질문하고 대답을 찾는다면 분명 코스프레를 하지는 않을 거다.”
지난 3월 말 국립창극단의 ‘서편제’에서는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의 윤호진 연출과 다시 콤비를 이뤘다. 황마를 소재로 아름다운 우리 자연을 담아내는 화폭이 된 무대는 인물까지 끌어안으며 소리와 하나가 됐다. 한지 스크린으로 그림자 극장을 만들어냈던 뮤지컬 ‘서편제’에 이어 또다시 한국적 아름다움이 구현된 무대의 표본을 제시한 셈이다. 사실 뮤지컬 ‘명성황후’와 ‘영웅’은 물론 연극 ‘리어왕’(2008), 오페라 ‘오르페와 에우리디체’(2010) 등 이전 작품들도 한국적 개성이 거대한 스펙터클과 만나는 무대로 줄곧 평가 받아 왔다.

-한국의 멋 살리기가 박동우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된 느낌이다.
“역시 ‘이 작품을 우리가 왜 하느냐’의 문제다. 창극 서편제에서는 애초에 윤호진 감독이 밝힌 연출 의도에서 지리산의 사계를 수묵화처럼 담아내고 싶다는 것이 큰 연출 목표였다. ‘오르페와 에우리디체’는 그리스신화로 만든 오페라인데, 그리스신화라고 유럽 흉내에 그친다면 답이 되지 않는다. 한국적이라기보다 이 땅의 지금으로 가져와 현대인의 삶 속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한 거다.”

-한국적 미의 발견에 고민이 많겠다.
“창극을 몇편 하면서 그 형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창극이란 판소리를 여럿이 나눠 하는 것일 뿐 원래 형식이 없었다. 그러니 공연 때마다 오페라연출가는 오페라처럼, 뮤지컬연출가는 뮤지컬처럼 만드는데, 그럼 쟝르의 특징은 뭐냐는 거다. 기본도 남아있지 않은 채 계속 바뀌니 먼저 형식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연출가들과 함께 노력해가야 할 문제다.”

-우리 전통 공연은 극장부터 달라야 하지 않을까.
“1902년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협률사가 창극용 극장이었다. 왕실에서 외국 사절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극장인데, 셰익스피어 시대의 극장과 비슷했다. 둥근 집 형태에 3면이 객석인 돌출형 무대로, 지금 영국의 글로브좌도 마찬가지다. 그런 무대가 우리 전통 공연에 적합하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비재현적인 공연이기 때문이다. 진짜처럼 보이려 노력하지 않는 공연에서는 관객이 무대를 둘러싸는 게 적합하다. 가장 비재현적인 공연이 마당놀이다. 마당놀이는 진짜처럼 보이려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다리에 말 인형을 끼우고 말 탄 시늉을 하지 않나. 관객이 극장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런 공연에서는 아예 4면을 다 둘러싸 버린다. 공연 시작 전에 엿 팔러 다니고, 툭하면 객석으로 뛰어들어 장난치고, 끝나면 다 같이 춤추고. 이런 참여형 무대가 우리 전통 공연에 훨씬 어울리는 방식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극장은 어떤가.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노도 상징적인 공연인데, 그런 종류의 극장은 우연이라기에 무서울 정도로 셰익스피어 시대 극장과 닮았다. 관객들은 ‘햄릿’을 엘시노어궁에서 일어나는 일로 바라보는 게 아니고 극장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안다. 배우들은 공연을 하고 나는 보고 즐긴다는 이런 연극성, 극장성을 즐기는 것이 비재현적 공연이다. 판소리나 창극도 부채 들고 저기 달이 떴다 하면 되지 달을 그리지는 않는다.”

-그럼 무대미술가는 뭘 하나.
“무대에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관객들의 극장 경험을 총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 무대미술이다. 예컨대 2009년 ‘거트루드’란 작품은 ‘햄릿’을 엘시노어성이 아니라 엘시노어라는 술집에서 일어나는 일로 바꿨다. 모든 관객이 바에 앉아 술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술집에서 보는 것처럼 연출했는데, 그런 극장 경험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작품 전체의 시각적 환경과 관객들의 극장 체험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무대만 디자인한다고 생각하면 좁은 생각이다.”

-일본의 경우 전통 예능의 무대 양식을 현대극에 이용해 해외의 찬사를 받기도 하는데 우리에겐 어떤 게 있을까.
“우리는 건축물로서의 극장이 처음 생긴 게 1902년이니 그 이전까지의 공연에 특징적인 무대미술적 요소가 최소한 극장적으로는 없다. 일본은 이미 17세기 가부키, 그 전에 노가 당시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극장의 뿌리가 있었다. 극장이란 잉여생산물이 있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산업이 융성하고 잉여생산물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이 돈을 내고 가부키를 보러 가고, 만드는 쪽은 관객을 많이 끌어들이려 철저히 노력해 발전해 왔다. 우리는 먹고 쓰고 남는 게 없으니 그걸 못했다. 또 유교를 중국보다 더 원리주의적으로 지켜 공연이 고작 궁중이나 유교 행사의 수단으로 쓰였다. 예를 다하는 수단으로 악이 쓰였을 뿐이니 질적인 차이는 필연이다.”

-그럼 ‘명성황후’ ‘영웅’ 등의 무대가 해외에서 평가 받은 요인은.
“종합적인 이유겠지만 ‘영웅’의 기차 영상과 실물이 교차하는 장면은 서양의 어떤 공연에서도 없었던 시도였고, 그만큼 어려움도 컸다. 기차가 달리는 영상이 실물로 변하는 메커니즘을 성공시킨 것이 공연 첫날이다. 기차를 가리고 있던 막이 순간적으로 사라져야 하는데 어떻게 관객이 모르게 사라지게 할 것인가, 마치 나로호 발사처럼 실패가 거듭됐다. 도저히 풀리지 않아 장면 자체가 무산될 뻔한 상황에서 ‘명성황후’의 발을 달다가 툭 놓쳤을 때 순식간에 떨어지던 경험을 살려 성공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는데.
“자베르 투신 장면이 신선했다. 무대 바닥에서 불과 10㎝ 떨어진 높이에서 밑으로 뛰었을 뿐인데 다리를 천장으로 쫙 올리고 밑에 조명과 회전무대가 돌아가면서 실제로 세느강에 투신한 느낌을 줬다. 진짜처럼 보였다는 게 아니라 그런 것이 극장적인 재미라는 거다. 뻔히 저건 무대 바닥, 가짜 다리가 올라갔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연극적 상상력에 쾌감을 느끼는 게 관객들의 극장 경험을 극대화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바로 저게 내가 추구해야 할 길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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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