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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미국은 다시 '서부의 시대'로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지난주 4월 16일부터 3일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하기 좋은 기업(Great Place to Work)’ 학회가 열렸다. 경제지 포춘에도 소개된 ‘미국 100대 일하기 좋은 기업’들이 참석해, 더 나은 업무환경을 위해 그들이 하고 있는 매력적인 프로그램들을 한껏 뽐내는 자리였다.

 이 학회를 만든 ‘일하기 좋은 기업 연구소’ 대표 로버트 레버링은 원래 비즈니스 저널리스트였다. 1980년대 초 뉴욕의 한 출판사로부터 ‘미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대한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는 매우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노사분쟁, 노동법 위반, 대량 해고 등 미국 기업들의 부정적인 행태를 주로 폭로하는 기사를 썼던 그는 ‘미국에는 일하기 좋은 기업이 100개나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책을 쓰기 위해 수백 개 기업의 3000명이나 되는 직원들을 만나면서, 일하기 좋은 기업은 고용이 안정되거나 복리후생이 잘된 기업이 아니라, 직원들이 회사를 신뢰하고 업무에 자부심을 느끼며 직원들끼리 가족애를 나누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매년 ‘일하기 좋은 기업’을 선정하는 행사를 벌여온 것이다.

 일하기 좋은 기업은 직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혜택은 고스란히 고객에게 전해진다. 신뢰와 자부심으로 가득 찬 직원들은 성실히 일하고 고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들의 성장이 S&P500지수에 포함된 기업들보다 2배 이상 가파르게 성장하며, 자발적 이직률은 절반에 불과해 유능한 인재들이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 3일 동안 진행된 이 학회 발표를 들으며 두 가지 행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나는 2011년 미국 동부에서 벌어진 ‘월가 시위(Occupy Wall Street)’였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더욱 심해진 빈부격차와 금융기관의 부도덕성에 반발해 일어난 이 시위는 심각한 양극화 현상과 신자본주의의 문제점, 금융업계의 비윤리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서부 네바다주 블랙 록 사막에서 매년 8월 말에 벌어지는 ‘버닝맨 축제’였다. 1986년 래리 하비가 친구들과 함께 모닥불 파티를 열고 2.4m 크기 나무 인형을 태운 것에서 출발해, 매년 사막 한복판에서 약 5만여 명이 벌이는 축제다. 사람들은 일주일 동안 사막 한가운데 도시를 건설해 히피정신을 이어받은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미친 듯이 즐기고 창조적 영감을 서로 주고받다가, 마지막 날 나무 인형을 태우고 원래 상태로 만들어 놓은 뒤 돌아온다. 이 축제는 개방과 창조성, 소통과 놀이, 공유와 혁신 등 실리콘밸리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행사다.

 이 두 행사가 학회 내내 떠올랐던 건, 요즘 미국 경제는 동부의 시대에서 서서히 서부의 시대로 다시금 옮겨가고 있다는 걸 학회 발표들 속에서 직감했기 때문이다.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주축이 된 동부의 경제는 엘리트주의, 경쟁주의, 논리와 수학으로 무장한 분석주의로 상징된다. 뉴욕, 보스턴, 워싱턴DC의 인재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부흥기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요즘 미국 경제는 바닥을 겨우 벗어난 상황. 엑손· 코노코-필립스 같은 에너지 회사, 골드먼삭스·웰스파고 등 금융 회사, 월마트·P&G 같은 생활용품 및 유통 회사가 대기업 리스트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들 업계의 부채는 불안할 정도로 많으며 한동안 뚜렷한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획기적인 혁신을 꾸준히 이루면서 현재 미국의 성장동력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 단연 테크놀로지 기반 기업들이다! 애플·구글·마이크로소프트·IBM·인텔 같은 회사들이 미국의 어려운 경제와 일자리 창출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동부에서 열심히 살다가 안 되면 서부로 가지 뭐’라며 서부의 좋은 날씨에서 편안하게 사는 걸 자조했는데, 이젠 경쟁적인 동부가 아닌 편안한 서부에서 날마다 혁신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혁신은 평가에 민감한 경쟁주의, 부자가 되겠다는 탐욕, 승진과 인센티브를 향해 달리는 엘리트주의에선 나오기 힘들다. 자발적인 동기로 충만한 몰입,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전 우주적 야심, 소통과 협업이 주는 일체감에서 혁신은 탄생한다.

 ‘일하기 좋은 기업’ 학회에선 저마다 회사들이 서부 실리콘밸리 회사들을 흉내 내고 있었다. 회사가 동부에 있든 중부에 있든 구글을 따라 하고, 자포스를 흉내 낸다. 안쓰럽고, 애처로울 정도로. 일하기 좋은 기업을 직원들의 복리후생 차원만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토대’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우리 기업들도 교훈을 얻을 것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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