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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에서 슥슥 그려도 작품이 됐다

소전 손재형의 ‘승설암도’. 1945년 작품으로, 당대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서울 성북동 ‘승설암’의 고즈넉한 풍경을 담았다. [사진 성북구립미술관]

손재형
누가 쓴 것인지는 몰랐어도, 누구나 한 번쯤 그의 글씨를 본 적이 있을 게다. 1970년대 국정교과서 표지에 적혀 있던 ‘국어’ ‘수학’ 등의 과목 이름, 잡지 ‘샘터’, ‘바둑’ 등의 따뜻하면서도 정갈한 한글글씨, 문학잡지 ‘현대문학(現代文學)’의 개성 넘치는 한문 표제 등….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의 작품이다. 소전은 사람들의 뇌리에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다양한 글씨를 남겼다.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에서의 서도(書道)와는 다른, ‘서예(書藝)’라는 말을 직접 만들어내고 이를 정착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뒤를 잇는 20세기 서예의 거장으로 ‘소전체(素<8343>體)’라는 서체를 확립한 그는 서예 작품뿐 아니라 교과서나 법전의 표제 등 대중에게도 친숙한 글씨를 다수 썼다.

 6월 16일까지 서울 성북동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소전 손재형전(展)’은 이런 선생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는 자리다.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소전 선생은 어릴 적부터 조부에게 글씨를 익혔으며, 스물한 살에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글씨는 자유로우면서도 기품이 있고 아름다웠다. 서세옥(84) 서울대 명예교수가 “소전 선생의 글씨는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한자의 다섯 가지 서체) 어느 것 신묘(神妙)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전시에는 소전체로 쓴 ‘화의통선(畵意通禪·그림의 뜻이 불교의 선과 통한다)’을 비롯해, 독특한 획과 넉넉한 감성을 지닌 서예 작품과 전각 등 40여 점이 나온다.

 소전은 서예뿐 아니라 그림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화가이자 문화재와 전통건축 등에도 조예가 깊은 ‘종합 예술인’ 이었다. ‘승설암도(勝雪庵圖)’는 1940년대 백양당 출판사 주인 배정국의 집이자 당대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승설암을 그린 문인화다. 1945년 봄 상허(尙虛) 이태준, 수화(樹話) 김환기, 심원(心園) 조중현 등의 예술가들이 한 데 모인 자리에서 상허의 요청을 받은 소전이 즉석에서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180호로 지정된 추사의 그림 ‘세한도(歲寒圖)’도 소전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소전은 일제 말기인 1944년, 일본 학자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가 이 그림을 갖고 귀국하자 그를 따라 무작정 도쿄로 건너갔다. 소전이 후지즈카를 찾아가 한 달 여간 간곡히 설득한 끝에 ‘세한도’는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의 사랑채 등 조선 후기 건축물의 일부분을 옮겨와 인왕산 자락에 지은 ‘석파랑’ 역시 소전의 높은 감식안을 보여준다.

  학생 1000원, 성인 2000원, 02-6925-5011.

이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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