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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마음 여니, 백성이 깨어나고, 문화가 꽃피다

학문을 숭상한 정조는 특히 책가도(冊架圖·서가 안에 책을 비롯해 도자기·문방구·향로 등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그린 그림)를 좋아했다. 정조가 사랑한 것은 책 자체의 그림이었으나, 18세기 상류층 취향은 책과 더불어 외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기물들을 병치하는 그림을 선호했다. 그림은 장한종의 ‘책가도 병풍’(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채색, 195x361㎝, 경기도 미술관 소장.
18세기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모두에 평화의 시대였다. 삼국 간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조선은 중·일 간의 중계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었다. 국제적 평화라는 외적 조건을 바탕으로 영·정조의 태평성대가 찾아온다. 치세를 이끈 두 임금 영조와 정조는 모두 콤플렉스가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고, 정조의 아버지는 비운의 사도세자였다. 이들은 탁월한 업적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당시 사회를 옥죄고 있던 신분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 서얼 차별 금지 등 두 임금의 열린 리더십은 17세기 교조적 성리학의 지배하에서 경직됐던 사회에 숨통을 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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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임금은 국민과의 관계를 열어놓았다. 영조는 궁궐 밖을 나와 한양 곳곳을 다녔다. 또 여러 궁에 현판을 남겨 유적지로 만들었다. 일종의 관광코스를 개발한 셈이다. 이런 영조의 행보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인조, 효종, 숙종 등 윗대의 왕들은 이반된 민심이 두려워 거리에 나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영조는 백성들에게 직접 얼굴을 내비쳤다. 통치자는 구중궁궐 속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의례 주인공 돼 백성 마음 파고든 정조
국왕의 자신감 있는 드러냄은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에서 정점을 이룬다. 『의궤』에 수록된 그림은 행차 구경을 위해 모여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보여준다. 어린아이, 여염집 아낙네, 엿장수, 떡장수까지 구경꾼의 면면을 상세히 그렸는데 이는 기층 민중에 대한 정조의 애정을 보여준다. 기층 민중에게 왕의 행차는 평생 잊지 못할 대단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스스로 의례의 주인공이 되어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

 정조는 건릉성제(健陵盛際)의 치세를 이끌었다. 이것은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그는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과로사’한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문사가 대필하던 연설문조차 손수 작성했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다산 정약용을 능가하는 박식한 인물이었다.

 정조의 진정한 위대함은 다양성을 인정한 데 있었다. 정조는 두려움 없이 열린 비판에 자신을 맡겼다. 심환지나 김종수 같은 반대파 인사를 기꺼이 등용해 정책에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도록 했다.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탄압으로 학문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학문과 종교를 분리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런 태도는 18세기 학문의 르네상스로 자연스레 연결됐다.

 덕분에 학구열은 궁궐 밖으로도 퍼져나갔다. 전국적으로 서당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합격률은 낮았지만 과거시험은 평민에게도 열려 있었다. “한 가지라도 잘하면 나를 등용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 때에는 20만 명이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모여드는 대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인구가 80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세계사적으로 놀라운 응시율이다.

 영조 시대의 이단전은 천민 출신이었는데, 탁월한 한시로 이름이 높았다. 사람이 신분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으로 인정받을 수 있던 좋은 시대였다. 영·정조의 열린 태도는 모두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주는 발랄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인간적인 것, 삶의 디테일에 눈길 준 시대
열린 자세는 학문적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18세기에는 17세기의 교조적 성리학에서 실증의 학문으로, 즉 의리와 윤리의 학문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만물에 대한 학문으로 대 전환이 이뤄졌다. 이전에 잡학이라 배척받던 실증적인 학풍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계몽주의의 백과전서파에 비견될 만한 학문 태도가 대두됐다. 또 그간 중국 중심의 획일화된 지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스의 지식을 수용한다. 특히 서양 과학기술은 신선한 지적 충격이었다. 이덕무, 정약용, 박제가 등 당대 내로라하는 젊은 지식인들은 모두 서양의 신지식에 열광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 중심적 지식체계에서 벗어나 중국의 시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조선의 역사와 현재를 바라보게 됐다. 이 같은 다양성의 허용은 주체성의 강화로 귀결됐다. 자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교과목을 재편성해서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등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고조선부터 고려 말을 다룬 안정복의 『동사강목』(1778년, 정조 2년), 발해의 역사를 다른 유득공의 『발해고』(1784, 정조 8년)가 쓰인 것도 이때다.

 안대회 교수는 18세기가 ‘기록의 시대’였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정조 스스로가 역대 통치자 중 가장 글을 많이 쓴 왕이었으며, 무수히 많은 기록을 남겼다. 기록 열풍은 서민 계층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삶의 모든 것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담뱃불을 붙이는 방법, 비둘기 사육법, 날마다 바뀌는 병영의 암구호까지, 이전에는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기록에서 ‘있는 것’에 대한 기록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 쓰인 『추재기이』 『초사담헌』 같은 책은 공식적인 역사에서 누락된 비천한 계층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시장의 떠돌이 공연예술가, 광대, 바둑 기사 등을 우호적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적인 것, 삶의 디테일에 대한 우호적 관심의 증대는 좋은 시대의 징표다.

 학문적 태도의 전환과 삶의 디테일에 대한 사랑은 다양성에 대한 요구로 표현된다. 27세에 요절한 역관 출신의 천재 이언진은 이런 시를 남겼다. “노자와 묵자, 법가와 명가가 일가를 이루듯/ 가을 단풍이 봄꽃에 양보할 필요가 있으랴?/ 승려와 도사에게 선비 옷을 입게 하면/ 성머리의 만 마리 까마귀가 될 뿐이지.” 만 마리 까마귀가 아니라 다양한 깃털을 허용하라는 요구는 지식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개인의 삶의 다양한 방면에서 표현됐다.

장서·문방구로 호사 부리는 게 ‘멋진 인생’
세속적 삶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건 안정적인 경제를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에서는 성욕 같은 육체적인 욕구뿐 아니라 상업적 이익의 추구도 멸시받았었다. 18세기에는 안빈낙도와 청렴결백의 선비를 대체하는 새로운 인물상이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이 그런 사람이다.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번 허생을 비난하면서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허생은 그렇게 번 큰돈을 모두 뿌리치고 다시 가난한 집으로 돌아간다. 사회에 내재된 이익 추구의 욕망을 한바탕 드러내놓고 유유히 무대를 내려간 것이다.

 교역을 통해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물건들은 다양한 소비문화를 발전시켰다. 안경, 시계 등 다양한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들이 사랑받았다. 이 무렵 갓 쓰고 선글라스를 멋지게 쓴 퓨전 패션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멋진 인생’을 만들었다. “푸른 휘장을 쳐서 창문을 아득하게 만드는 것, 예스러운 솥에 향을 피우는 것, 유리 등잔에 촛불을 켜 어둠을 몰아내는 것…서화를 품평하는 것”이라고 나열한 유만주가 묘사한 ‘멋진 인생’은 지금 들어봐도 그럴듯한데, ‘향’ ‘유리 등잔’ 등은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품들이다.

 ‘멋진 인생’의 뺄 수 없는 필수품은 장서의 수장과 문방구 사치다. 안대회 교수는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훌륭한 시대라는 직접적인 지표로 책과 종이를 꼽는다. “종이의 질과 장정만 보더라도 문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책들은 300년이 지났는데도 얼마 전 찍은 책처럼 새롭고 종이 질도 최고다. 사회 전체에 배어 있는 살아 있는 지식의 활기가 책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책거리 그림의 대대적인 유행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양성을 추구하는 개방적 분위기는 정조 사후 급격하게 단절된다. 정조가 죽은 바로 다음 해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외래적인 것의 배척과 엄격한 사상적 통제가 시작된다. 열린 사회에서 닫힌 사회로, 번영과 안정의 18세기에서 불안과 혼란의 19세기로의 전환이다. 19세기로의 전환은 ‘전통의 끝이자 근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18세기는 소위 ‘한국적인 것의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원형이 마련된 시대였으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멋진 인터페이스가 되는 시대였다.

※다음 회부터는 S매거진으로 옮겨 격주로 연재합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한국 고전문학계의 소문난 글쟁이다. 18~19세기 문인들의 시와 산문을 쉽고 아름답게 소개해 우리 고전문학이 낡고 고루한 게 아니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고전산문산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 『정조의 비밀편지』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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