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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음식잡설] 팥빙수·단팥빵·부대찌개 … 근현대사가 남긴 '선물'

평양냉면을 즐기는 매니어들은 그들만의 단골 의식을 치른다. 이를테면 선주후면(先酒後麵)의 은밀한 공통 정서랄까. 제육이나 수육, 빈대떡과 만두를 먼저 한 접시 하면서 술을 마시고 그 다음에 면을 먹는다. 식전에 내주는 메밀 삶은 물(면수)에 간장을 타서 먹는 것도 단골 사이에서 비전되는 음용법이다.



그런데 일본에서 메밀국수를 시켜 먹다가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았다. 그들도 면수에 간장을 타서 홀짝이는 게 아닌가. 이런 음용법의 원조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때 식민지 상황에서 전파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권력은 철수한 지 오래됐지만 식민의 족적은 음식과 언어, 복식 같은 민중의 정신에 남아서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한다.



베트남에 가면 ‘빗텟’이라고 부르는 프렌치 스테이크가 있다. 달걀을 부치고 프렌치 프라이까지 곁들인 영락없는 프랑스식 스테이크다. 프랑스 빵인 바게트가 호찌민의 명물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이지만 한때 그 섬을 지배했던 아랍의 음식을 여전히 먹는다. ‘쿠스쿠스’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아라비안 푸드다. 아랍에서 전래한, 아몬드와 설탕으로 만든 화려한 과자를 즐기는 것도 여전하다. 아랍풍의 유적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그 섬에서도 음식만큼은 끈질기게 대를 잇고 있다. 그렇듯 우리가 먹고 마시는 많은 행위 안에는 인간 역사가 만들어낸 식민의 흔적이 들어 있다.



“밥으로 하실래요, 아님 빵으로?”를 묻던 경양식집의 돈가스는 1800년대 후반 일본 메이지유신을 통해 생겨난 유럽풍 고기 먹기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일제 때 조선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단팥빵은 빵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모찌와 서구의 빵을 합친 일종의 퓨전 음식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일본 여행을 가면 잊고 있던 우리 추억이 한 꺼풀씩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추억이 식민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쌍화차와 달걀을 팔던 아버지 시대의 다방은 외부 디자인과 실내 풍경까지 너무도 흡사하게 일본에 살아남아 있다. 에펠탑을 닮은 빙삭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얼음을 갈고 팥빙수를 만드는 모습도 1960년대의 한국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몽골도 우리 음식 역사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소주는 물론이고 불고기와 설렁탕, 만두와 순대까지 몽골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음식을 우리는 아직도 누리고 있다. 음식의 유전자는 이처럼 질기고 생명력이 강해 오래전 잊힌 역사까지 불러내고 있다.



언젠가 월남전 참전 군인과 함께 부대찌개를 먹었다. 그는 그 음식을 놓고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전우들과 전장에서 먹던 바로 그 음식이라는 얘기였다. 미군이 준 고기와 햄에 한국에서 보내온 김치통조림을 섞어서 찌개를 끓였다는 설명이었다. 찌개 한 그릇에 깊게 새겨진, 우리가 잊고 있던 격동의 현대사가 떠올라 나 역시 한동안 말을 잊었다. 역사는 흘러도 음식은 남는다. 우리 앞에 차려진 한 상의 밥을 놓고 그 난마(亂麻) 같은 우리 역사를 떠올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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