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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의 시시각각] 하얀 국물 삼총사와 녹색성장

이규연
논설위원
2011년 여름, 꼬꼬면이 나왔을 때 시중의 첫 반응은 이랬다. ‘라면 하면 빨간 국물이지, 하얀 국물 라면이 팔리겠어’. 그게 아니었다. 여성·젊은층의 관심이 몰리면서 대박이 났다. 부동의 1위 신라면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점유율을 높여갔다. 나가사키짬뽕·기스면도 가세했다. 하얀 국물 삼총사의 점유율은 그해 12월 17%까지 올라갔다. 신기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삼총사의 몸집은 한창 때의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독특한 때깔로 잠시 주목을 받았지만 빨간 국물 선호라는 강력한 식습관을 바꾸지는 못했다.



 녹색성장의 롤러코스트도 하얀 국물 삼총사 신세다. 이명박 전 대통령(MB)은 2008년 광복절 경축사 때 녹색성장을 국가 어젠다로 선포한다. 기후변화 국제회의를 다녀와서 충분한 준비 없이 던진 화두였다. 이후 동원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대통령의 말은 공공·민간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간다. 녹색경제·녹색기술·녹색금융…. 심지어 환경훼손의 가능성이 큰 4대 강 사업까지 녹색 옷을 입는다.



 대선이 끝나자마자 대한민국은 또다시 놀랄 만한 복원력과 창조성을 보인다. 녹색성장은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된다. 녹색성장위원회는 격하되고, 주무 부처인 환경부조차 부서명 곳곳에 침투해 있던 녹색을 핀셋으로 뽑아낸다. 녹색 자리에 창조가 치고 들어가 창조경제·창조기술·창조금융이 출현한다. 민간은 녹색이라고 하면 정부지원금이 안 나올까 봐 지원서 표지를 미래창조로 바꿔 끼운다.



 우리는 바람의 사회에 산다. 바람이 자주 분다. 사람들은 바람에 민감하다. ‘딜리트(delete·삭제)’ 사회이기도 하다. 바람이 바뀔 때마다 키보드의 딜리트 키를 쿡쿡 눌러댄다. 새 바람은 지난 바람의 자식을 지워버린다. 딜리트 바람 사회는 유행·짝퉁을 만드는 데 유리하지만 진중한 습관·문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불리하다. 이번에도 녹색 개념이 개인 대뇌와 사회 시스템에 자리 잡기 전에 새로운 바람에 사라질 신세다.



 며칠 전 환경교육운동가인 하지원 에코맘 대표에게서 『녹색성장 1.0』을 받았다. 녹색성장위원회의 활동을 정리한 신간이다. 그도 위원회 멤버였다. 녹색성장과 4대 강을 겹쳐 보이게 한 점, 사회 저변에 좀 더 파고들지 못한 점 등은 아쉬운 대목이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623쪽에 달하는 책을 아무리 뒤져봐도 ‘4대 강’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적지 않은 문제점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질 만큼 녹색성장의 유효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강조했다. 실제로 개도국에 한국은 ‘녹색성장의 아버지 나라’이다. 캄보디아는 우리 녹색성장기본법을 본떠 자국법을 만들려 하고, 카타르는 녹색성장위원회를 만들겠다며 우리에게 전문가 파견을 요청했다. 국제기구인 녹색기후기금을 인천에 유치하면서 탄소거래경제와 녹색금융을 일으킬 여지도 생겼다.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탄소중립위원회가 출범했다. “역대 어느 국제대회보다 탄소중립적으로 치르겠다”(전현희 위원장)는 게 조직의 목표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대한 줄이고 삼림 조성 등을 통해 탄소 배출을 상쇄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녹색성장의 핵심 정책인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준비하는 성격도 있다. 칠판에 적힌 ‘MB식 녹색성장’ ‘4대 강’을 지우는 과정에서 탄소중립 활동 같은 녹색의 가치·잠재력까지 함께 훼손하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얀 국물 바람은 식습관을 바꿀 만큼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라면 하면 빨간 국물이라는 등식에 균열은 냈다. 많은 사람이 경험했고 그 기억은 뇌 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다. 이를 되살릴 재주만 있다면 빨간 국물 철옹성을 다시 공략할 교두보를 만든 것이다. 녹색성장 역시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갈색으로 뒤덮인 성장주의자들의 대뇌에 녹색기호를 새길 발판은 마련했다. 녹색성장의 유효성이 남아 있는 한 발판까지 뺄 필요는 없다. 바람의 덕을 못 보는 지금, 아시안게임을 앞둔 지금이 그 진가를 따져볼 적기일지 모른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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