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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파리서 디저트 공부한 떡집 아저씨

처음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가 잘나가는 요리사여서가 아니다. 솔직한 말로 세계 유수의 요리학교 출신이라느니, 미슐랭 별점을 받은 유명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았다느니 하는 자칭·타칭 유명 셰프가 강남 바닥에만도 얼마나 많은가. 그를 눈여겨본 이유는 그가 대치동 키즈였기 때문이다. 자식 공부 뒷바라지에 온 정성을 쏟는 전형적인 대치맘에게서 자란 대치동 키즈가 이토록 비전형적인 삶을 산다는 게 재미있고 신기했다.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이유가 뭘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막상 만나보니 그는 출신 성분(대치동 키즈)과 현직(요리사)에만 괴리가 있는 게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예측 가능성을 저버렸으며, 어떤 면에서는 이율배반적이었다. 전통병과 전문점, 다시 말해 떡집 합(合)의 신용일(39)셰프 얘기다.

그렇다. 그는 떡집을 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대학 시절 잠깐 어학연수를 했느냐고? 아니다. 프랑스 최고의 디저트 학교인 에콜 르노트르를 졸업했다. 혹시 어릴 때 프랑스에 살아서 프랑스어가 편한가? 그것도 아니다. “영어도 버겁다”는 국내산 토종이다. 특히 어학엔 소질이 없는지 아직도 프랑스 말이 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처음 유학을 갔을 땐 아예 한마디도 몰라 눈치코치로 요리를 배웠을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요리를, 아니 디저트를 배웠고, 국내 유명 제과업체의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하고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다시 일본과 스위스 등에서 경력을 더 쌓은 후 자기 떡집을 냈다. 하지만 정작 떡은 안 좋아한단다. 대신 케이크광(狂)이다.

 아, 먼저 이 얘기부터 해야겠다. 합의 떡을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맛은 일단 제쳐두고 생김새부터 확연히 다르다. 요즘은 전통 떡집 가운데서도 예쁘고 정갈하게 개별 포장한 떡을 많이 팔지만, 합의 떡은 이런 것과도 또 완전히 다르다. 값비싼 유럽 디저트나 고급 일본 과자처럼 떡 하나하나를 다 다르게 아기자기하게 포장하고 그 떡을 갈색 종이 상자에 담은 후 이를 무명천 보자기에 싼다. 보자기에 싸인 합의 떡 상자는 너무 고급스러워서 열기 아깝고, 일단 열면 포장된 떡이 너무 예뻐서 포장지를 찢어 먹기 아깝다. 여러 대기업 오너들이 합의 떡을 선물로 애용하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나 보다.

 이런 앙증맞은 디자인을 구사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얼마나 섬세할지, 아니 예술가연하며 얼마나 까다롭게 굴지 절로 상상이 간다. 그런데 웬걸. 그는 이런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간다. 도도함보다는 자기를 낮추는 한없는 친절함이 오히려 상대방을 당황하게 한다. 게다가 섬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투박한 얼굴에다 어디에서도 밀릴 것 같지 않은 당당한 풍채라니…. 맞다. 그는 대학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중·고교 시절엔 늘 학교 대표로 육상 대회나 테니스 대회에 나가 상까지 탔던 스포츠맨이다.

 그는 이렇게 묘하게 이율배반적이다. 서울대 출신 부모님 아래서 태어나 어머니의 정성 어린 공부 뒷바라지를 받았으나 결국 체육학과를 택해 가까스로 명문대(연세대) 문턱을 넘은 대치동 키즈. 체대를 나왔지만 패션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며 무작정 의류사업부가 있는 대기업에 들어간 무모한 젊은이. 튀는 감성으로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순간에 요리가 더 좋다며 번듯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요리학원 문을 두드린 철없는 남자. 떡을 배우겠다며 프랑스로 떠난 엉뚱한 모험가. 그러나 이젠 “한국 사람인 내가 떡을 안 하면 누가 하겠느냐”며 “내가 지금 안 하면 우리 후손은 떡이란 게 있었던 사실조차 모를 것”이라며 사명감을 불태우는 민족주의자.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은 낳을 생각 없는 쿨한 현대인. 다음은 모순덩어리 떡집 주인 신용일과의 일문일답.

-떡은 우리 음식이다. 한국에서 배우면 될 것을 왜 굳이 프랑스로 유학을 갔나.

 “우리 떡은 수십 년 동안 정체돼 있다. 케이크는 크림에서 생크림·시폰 등 계속 발전하는데 떡은 근본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채 겉모양만 달라졌다. 떡 케이크나 개별 포장 그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떡 자체는 옛날 떡 그대로 아닌가. 그래서 디저트가 발전한 프랑스를 택했다.”

-프랑스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나. 미국에도 유명 요리학교가 많은데.

 “어차피 영어도 못한다. 제대로 배우려면 본고장에 가야 하지 않나. 무작정 프랑스에 갔다. 유명한 베이커리를 찾아다니며 그곳 셰프에게 디저트 학교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열이면 열, 다 에콜 르노트르를 꼽더라. 그래서 들어갔다. 학비가 비싸서인지 입학 시험이 까다롭지 않았다. 여기서 배운 제과·제빵 기술을 떡 만들 때 응용해서 쓴다. 또 제빵기와 오븐을 사용해 떡을 반죽하고 쪄낸다.”

-빵 만들듯이 떡을 만든다는 얘기인가.

 “보통 떡은 몇 시간만 놔둬도 금방 굳는다. 왜 그런지 아나. 떡을 만들 때 쉽게 만들려고 이스트를 넣기 때문이다. 만들기는 쉽지만 특유의 쫄깃한 질감도 사라진다. 과거엔 절구로 떡 반죽을 치댔다. 공기 층이 반죽 사이사이에 생기면서 떡이 쫄깃하고 맛이 오래 유지됐다. 제빵기가 절구와 비슷한 효과를 낸다. 그래서 제빵기로 만드는 합의 떡은 한참을 둬도 딱딱하게 굳지 않는다. 힘들 게 만들지만 다 그만 한 가치가 있다. 합 떡은 한 개당 대략 2000원쯤 한다. 비싸다고 우리 부모님도 잘 안 사드신다. 그런데 만드는 정성과 공정을 생각하면 난 이게 비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유명 베이커리나 백화점에서 파는 마카롱이나 초콜릿도 개당 2000원쯤 한다.)

-원래 요리를 잘했나.

 “전혀. 식재료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요리를 배우겠다고 궁중음식연구원을 다녔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한정식집 지화자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걸 알았다. 무작정 들어가서 일하겠다고 했더니 바로 다음 날 새벽 5시30분까지 나오라고 하더라. 다들 내가 안 나올 줄 알았다더라. 분당 살 땐데 새벽에 일어나 갔다.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엔 멥쌀과 찹쌀도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니 그게 오히려 창의적인 떡을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됐다. 원래 떡이 어떠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이다. 6개월 만에 메뉴 개발을 맡았다. 그게 10여 년 전 일이다. 최근 매대에서 보니 그때 개발한 떡이 아직도 팔리고 있더라. 부끄러운 현실이다. 떡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배우 배용준이 일본에 낸 한식당 ‘고시레’에서 부주방장으로 일했다. 주스위스 제네바 한국 대사관저 요리사를 거쳐 고급 한정식집 ‘품 서울’의 셰프를 하기도 했고. 어떤 인연이 있었나.

 “두 곳 모두 정소영 식기장의 소개로 일하게 됐다. 고시레의 셰프 뽑는 일을 지금은 아내가 된 김미회(매일유업 외식사업팀)씨가 당시 담당했다. 계약 기간 1년을 채웠다.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 대사관저 추천이 왔을 때 당시 ‘지금 나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 도전했다. 각종 국제기구가 모여 있는 곳인 만큼 각계 주요 인사를 초청해 여는 연회가 많다. 하지만 평소엔 대사 부부의 식사 준비가 주된 일이다. 보통의 남자 셰프는 ‘요리’와 ‘음식’의 차이를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오래 버텼다. 김장도 직접 했다. 제네바 근무가 인맥 쌓는 데는 물론 다양한 요리를 경험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

-명문대에 가서 전문직의 길로 접어드는 여느 대치동 키즈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

 “나뿐 아니라 우리 삼형제가 다 그렇다. 우리 부모님을 포함해 가족 중에 서울대 출신이 많은데 우리 대에 딱 끊겼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가 ‘왜 대가 이어질수록 애들 머리가 이러냐(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말씀하셨을까. 어머니는 전형적인 대치맘이었다. 형은 고등학교 때 고액과외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형은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를 졸업했고, 동생은 경원대를 나왔다. 난 연세대 출신이니 학벌은 내가 제일 좋다.”

-서울대 지상주의 대치동에 살았던 부모님은 자식 농사를 망쳤다고 생각하시나.

 “전혀. 다들 만족하신다. 지금이 오히려 남들이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다 잘 키웠느냐’고 묻는다니까. 형(신용원·41)은 GE 아시아 총괄 이사고, 동생(신용우·35)은 국내에서 목소리로만 돈을 벌 수 있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성우다. 가끔 형제가 만나 장난친다. 누구 이름이 먼저 검색되는지 하고 말이다. 지금은 동생의 승리다.”

글=안혜리·송정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신용일

1973년생

프랑스 에콜 르노트르 졸업

스위스 제네바 대사관저 요리사

한식당 품 서울의 헤드셰프

전통병과 전문점 ‘합’의 오너셰프

1989년 대치중 졸

1992년 중동고 졸업

1998년 연세대 체육학과 졸업

[삶]

사는 곳: 한남동

장 보는 곳: 청담동 SSG·갤러리아 고메이494

자주 가는 식당: 청담동 호무랑

[가족]

아내 매일유업 외식사업팀 부장 김미회(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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