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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리듬과 하나 된 내면의 질주

재클린 뒤프레가 한때 남편이었던 다니엘 바렌보임과 리허설 도중 악보를 보고 있다. [www.tumblr.com]
재클린 뒤프레(1945~87)를 다시 듣는다. 새삼스럽게 이미 많이 알려진 이름을 왜 거론하는가?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첼로 음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터무니없는 오해로 이 여성 첼리스트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최근 우연한 기회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d단조 2번의 전반부(Prelude, Allemende, Courante)만 올려진 녹음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놀람과 그로 인한 자괴감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

모음곡 중 단조인 2번과 5번은 비교적 빛을 덜 받는 곡인데 반대로 차분한 명상적 분위기는 더 돋보이는 면이 있어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연주가는 5번의 사라방드에 애착을 보이기도 한다. 근래 어느 음악 사이트에 우연히 들렀다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서양 고전음악 순위에서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이 1위라는 걸 보고 놀랐다. 순위야 자주 바뀔 수도 있겠으나 시대가 바뀌고 음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감각도 많이 변한 걸 느낀다.

1960~70년대에 충무로 음악감상실에서 자리가 가득 차 바깥 계단에서 대기하는 손님이 들어오지 못할 경우가 생기면 이 첼로곡을 부랴부랴 틀어놓으면 거짓말처럼 오래 꿈적도 하지 않던 연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자리가 많이 비어 바깥 새 손님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 이 음악은 ‘손님 내보내기’ 용으로 딱 맞는 지겹고 시끄럽기만 한 곡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이 선호하는 음악 1위라니! 반세기 동안 사람들 감각과 인식은 이만큼 진보한 것인가? 그 음악실은 좌석이 고작 20~30석 정도로 규모가 작아 휴일 같은 때는 이런 일이 자주 발생했다.

재클린 뒤프레에게 나는 개인적으로 참 미안한 일이 하나 있다. 수년 전 어느 오디오 잡지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음반 40여 종을 보내주고 리뷰를 써보라는 제안이 있었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인데 40인의 연주를 한 달 동안 지겹게 들었다. 개인 취향으로 10위까지 순위도 매겨봤다. 거기서 1위가 된 연주가는 당시 거의 무명이었는데 그의 LP 음반은 상당한 고가로 거래되었다. 지금은 호가가 많이 낮아진 것 같으나 여전히 구하기는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그때 재클린 뒤프레의 음반은 잡지 측에서 아예 보내지도 않았다. 이 연주가에 선입견을 갖고 있던 나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미국 음악계를 주름잡는 유대계 마피아, 영국이란 배경, 거기에 기구한 개인사까지 한몫 거들어 만들어진 명성이 아닐까. 이런 오해를 오랜 기간 떨쳐내지 못했다.

그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과 하이든의 협주곡을 최근 들어보고 이 연주가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였나를 깨닫게 되었다. 만약 그 여름에 재클린 뒤프레의 음반이 포함되었다면 단연코 10위 안에, 아니, 상위를 다투었을 것 같다. 하이든 협주곡 역시 백미 중 백미다. 재클린 뒤프레는 바흐 곡에서 부드러운 운궁과 섬세한 디테일로 카잘스가 보여주는 웅휘(雄揮), 위엄과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연주에서는 내면의 리듬-심장 혹은 가슴의 리듬-이 실제 리듬과 일체가 되어 곡의 흐름이 한 순간도 정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일체가 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기계적으로, 단지 만들어내는 죽은 소리다. 유명 연주자들 연주에서도 마치 호흡이 단절되는 것 같은 이런 단절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 일체감은 후천적으로 습득되거나 혹은 타고난 소질일 수도 있다.

재클린 뒤프레는 어느 곡이나 시작할 때 템포를 느리게 잡아 조심스럽게 내면의 리듬에 음악을 끼워 맞춘다. 그리고 거침없이 질주한다. 첼로 소리는 어느 경우에나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하이든 협주곡의 페시지는 경쾌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섬세하게 모든 구석구석의 디테일을 살려내는 그 집중도는 어느 연주가와도 비교되지 않는다.

엘가(Edward Elgar·1857~1934) ‘첼로협주곡’에서도 같은 조심성을 보여준다. 시작은 느리고 주춤거리지만 궤도에 오르면 그 힘이 난폭할 정도로 폭발한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연주를 듣고 자기 연주 목록에서 엘가를 삭제했다고 한다(노먼 레브레히트의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러운 죽음』). 이 엘가 음반은 200만 장 이상 판매돼 역대 순위에도 상위에 올라 있다.

악보를 읽는 것은 연주자이지 감상자가 아니다. 감상자는 연주자를 통해 음악을 듣고 이해한다. 연주의 품과 질이 중요한 것이다. 수준급의 연주가가 즐비해 어느 것을 들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청중은 언제나 최고의 것, ‘가장 좋은 것’을 원한다. 그것이 그 음악을 가장 잘 해명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론으로 말하기 전에 우리는 감성으로 벌써 알아차린다. 17세(바흐 곡 녹음 당시)에 마치 수십 년 삶을 살아버린 것 같은 지혜가 담긴 이런 연주가 가능한가? 어느 연주가는 60세가 지난 뒤 이 곡을 녹음하고도 다수 애호가를 설득하지 못했고 어느 연주가는 다섯 번, 여섯 번 녹음을 되풀이하고 일본의 가부키 무희, 정원사, 현대 무용수까지 동원해 이 곡의 묘미를 살려보려고 했으나 여전히 미궁에 머물고 있다.

재클린 뒤프레, 참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다. 그의 연주를 재음미하고 난 지금 더욱 그렇다. 재클린 뒤프레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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