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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10년간 펴낸 毛 어록·선집·전집 무려 44억부

1950년대 중엽의 베이징대 도서관 열람실. 마르크스의 흉상이 인상적이다. 당시만 해도 마오쩌둥은 개인숭배를 거부했다. 흉상이나 동상 건립을 못하게 했다. [사진 김명호]
중국은 출판대국이다. 송대(宋代: 960~1270년)에 이미 전 세계의 발행부수를 합친 것보다 많은 책을 출간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16>

1948년 봄, 중공은 국·공 내전의 승리를 확신했다. 대도시의 신문과 출판사업 관리에 나섰다. 같은 해 6월,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하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홍콩에서 문화·학술 방면의 통일전선을 관장하고 있던 장한푸(章漢夫·장한부)에게 전보를 보냈다. “생활서점(生活書店)과 독서출판사(讀書出版社), 신지서점(新知書店)의 간부와 편집진들을 우리 점령 지역으로 이전시키고 싶다. 가능 여부를 타진해라.”

세 서점은 합병을 서둘렀다. 10월 18일, 연합이사회를 열어 새 상호를 ‘생활, 독서, 신지 삼련서점(生活, 讀書, 新知 三聯書店)’으로 정하고 황뤄펑(黃洛峰·황락봉)을 총관리인으로 선출했다. 황뤄펑은 홍콩과 상하이에 흩어져 있던 간부와 편집진들을 수륙 양로를 통해 화북ㆍ동북ㆍ화중 지역으로 분산시켰다.

1949년 1월 28일, 부산과 평양을 경유해 선양(瀋陽)에 도착한 황뤄펑은 신임 동북국 서기 가오강(高崗·고강)으로부터 저우언라이의 전문을 전달받았다. “중앙의 신문출판 공작을 준비해라. 간부 배치와 인쇄, 용지 확보에 만전을 기해라.”

1월 31일, 베이핑(北平)에 입성한 중공 중앙은 신문출판기구의 일원화를 추진했다. 점령지역에서 신문 출판에 종사하던 농민 출신 간부와 국민당 지역에서 활동해온 삼련서점(三聯書店)의 간부들로 구성된 신문출판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회는 ‘신문출판국’이 신설되기 전까지 신중국의 언론과 출판을 주도했다. 황뤄펑은 “어느 시대나 얼치기들이 문제”라며 ‘공산주의 운동 중 좌파 유치병’ 등 300만 부를 베이징과 톈진 지역의 간부들에게 배포했다.
1949년 10월, 중공정권 수립부터 문혁 이전인 1965년까지 16년간 중국의 출판계는 212억5400만 부를 시장에 내놨다. 개인 저작물로는 마오쩌둥의 선집과 어록이 6억8200만 부로 가장 많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저작은 다 합쳐도 6909만 부, 마오쩌둥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대형 정치운동은 출판계를 위축시켰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면서 출판량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4년이 지나서야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잠시였다. 계급투쟁이 본격화되자 제대로 된 학술서적이 자취를 감췄다. 문학 작품도 예외일 수 없었다. 공식화된 책들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시(詩)는 장편 서사시 일색이었다. 글자 수대로 원고료를 받다 보니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1965년, 전국에서 출판된 서적 중 신간은 1956년의 49%를 밑돌았다. “사회주의가 중국을 망쳐놨다”는 불평이 지식인들 사이에 일기 시작했다.

1966년, 문혁이 발발했다. 5월 8일, 국방부장 린뱌오(林彪·임표)가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개인숭배를 고취하는 발언을 했다. “마오 주석의 말은 구절 구절이 진리로 가득하다. 한 구절이 우리 같은 것들의 만 구절을 능가한다. 주석의 말이라면 뭐든지 우리의 행동 준칙으로 삼아야 한다. 반대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전 당원이 나서서 주멸(誅滅)해야 한다. 전 국민이 토벌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린뱌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오쩌둥 선집 출판 경쟁이 시작됐다. 중앙 선전부가 한 해 발행량을 8000만 부로 한정했지만 초과 달성을 쟁취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각 성(省)의 출판국장이나 출판사 사장, 편집장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하나같이 홍위병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섭씨 45도를 오르내리는, 전국에서 제일 더운 곳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했다.

서점들도 편치 못했다. 마오쩌둥 선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서점은 반당, 반혁명분자의 소굴 취급을 받았다. 그간 출간된 책들 거의가 창고에서 썩어갔다. 신화서점 베이징 발행소 한곳만 해도 8030만 부가 창고 밖을 나오지 못했다. 도서관도 대출 업무를 중지했다. 한 권 한 권이 금덩어리나 다름없는 진본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문혁 10년간 마오쩌둥의 저작물은 넘쳐났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4권짜리 마오쩌둥 선집만 9억6486만 부를 찍었다. 어록은 10억3000만 부를 조금 밑돌았다. 선집을 요약한 선독(選讀)은 8412만 부밖에 찍지 않았다. 55종의 문자로 옮긴 저작전집이 제일 많았다. 24억1416만 부를 찍었다. 책만 찍은 게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초상 41억8330만 장과 어록이나 시 한편을 실은 포스터 21억 장도 문혁의 산물이다. 이상 공식적인 통계 외에 기관이나 군부대, 학교 등에서 찍은 것까지 합하면 전체 수량이 200억 부를 초과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얼마 전 중국 정부는 신문출판총서(新聞出版總署) 명의로 농촌 도서관 설립계획안을 발표했다. 64만 개 도서관에 150억 부의 도서를 공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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