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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21> 다롄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100년 비바람 시련을 겪으니, 북방의 밝은 진주가 빛나네(百年風雨洗禮, 北方明珠生輝).” 1999년 8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다롄(大連)시 성립 100주년을 기념해 방문하면서 남긴 문구다. 당시 다롄의 1인자 보시라이(薄熙來)는 정치적 도약을 위해 장쩌민을 극진히 대접했다. “공부는 베이징, 일은 상하이, 노후는 다롄에서”라는 말처럼 다롄은 선망의 도시다. ‘북방의 홍콩’으로도 불린다.



인구밀도 베이징의 절반 … 은퇴자의 로망 ‘북방의 홍콩’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다롄의 탄생



중국의 대표적 녹색도시인 다롄(大連)시 노동공원 전경이다. 러시아 차르시대에 조성됐다. 당시 공원에서 키우던 호랑이가 유명한 국제 여간첩을 물어 ‘호랑이공원’으로 불렸다. 일제시대 ‘중앙공원’을 거쳐 신중국 성립 후 ‘노동이 세계를 창조한다’는 비석이 세워지면서 ‘노동공원’이 됐다. 공원 한가운데 위치한 직경 23m의 축구공조각은 다롄의 상징으로 불린다. [중앙포토]


다롄은 북한 남포항 정서쪽으로 333㎞ 떨어진 랴오둥(遼東) 반도 남단의 항구도시다. 당(唐)대에는 삼산포(三山浦), 명(明)·청(淸)대에는 삼산해구(三山海口)·청니와구로 불리던 작은 어촌이었다.



 산해관(山海關)을 넘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은 행성(行省)과 번부(藩部)를 설치하면서 대륙을 접수했다. 정작 고향인 동북에서는 동진하는 제정러시아에 밀렸다. 러시아는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 1858년 아이훈(愛琿)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맺으며 청의 영토를 야금야금 앗아갔다. 수세에 몰린 청은 군사기구인 ‘장군(將軍)’을 동북 변경 세 곳에 설치했다. 1907년 ‘장군’을 봉천(奉天, 지금의 랴오닝·遼寧)·길림(吉林)·흑룡강(黑龍江) 3개 행성으로 바꿨다. 동북 3성의 시작이다.



 다롄은 일본이 선점했다.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다롄, 뤼순(旅順), 안둥(安東, 지금의 단둥·丹東)을 점령했다. 패배한 청은 1895년 4월 17일 대만과 펑후제도(澎湖諸島), 랴오둥 반도를 일본에 할양했다.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배상금 은(銀) 2억 냥은 별도였다. 하지만 일본의 기쁨은 잠시였다. 막강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손잡고 4월 23일 일본에 랴오둥 반도 포기를 권고했다. 삼국간섭이다. 일본 정부는 중국에 포기 대가로 은 5000만 냥을 받아내 실리를 챙겼다.



 러시아가 다롄의 새 주인이 됐다. 1898년 3월 청과 ‘뤼순·다롄 조차 조약’이 체결됐다. 러시아는 만주를 동서와 남북으로 관통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의 남쪽 종착역을 다롄에 만들었다. 1899년 8월 11일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다롄에 자유항을 건립했다. 기존의 청니와를 ‘다리니(дальний, 멀다)’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바꿨다.



 절치부심하던 일본은 1904년 2월 4일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결심한다. 러일전쟁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육상의 일본군은 진저우(金州), 다롄, 뤼순, 안둥을 급습한 뒤 랴오양(遼陽)으로 진격했다. 1905년 3월 1일 지금의 선양(瀋陽) 인근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열흘간의 전투에서 일본이 승리했다. 5월 말에는 러시아 함대마저 패퇴했다. 9월 5일 미국의 중재로 러·일은 ‘포츠머스 조약’에 조인했다. 러시아는 뤼순·다롄과 그 주변의 영토와 영해의 조차권, 창춘(長春)·뤼순을 잇는 철도와 그 지선과 부속된 모든 권리와 특권(채광권 포함), 재산을 무상으로 일본에 양여했다. 중국의 주권은 유명무실했다. 제국주의 일본은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다롄은 일본의 조차지가 됐다. 일본은 ‘다리니’를 ‘다롄’으로 바꿨다. 랴오둥 반도 남단을 관동주(關東州)로 획정하고 식민통치기구를 세웠다. 1906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이하 만철)가 설립됐다. 본사는 다롄, 분사는 도쿄에 설치했다. 만철은 다롄에 ‘만철조사부’를 설치했다. 만철조사부는 선양·지린·하얼빈·베이징·상하이 등에 사무소를 두고, 중국의 군사·정치·경제 정보를 수집하는 거대한 정보조직으로 보폭을 넓혔다. 1919년 세워진 관동군사령부는 중국 침략의 선봉이 됐다.



 1945년 8월 10일 소련은 대일 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국을 향해 진격했다. 24일 다롄을 재점령한 소련은 뤼순에 해군기지를 건립했다. 11월 8일 다롄시 인민정부가 성립했다. 1950년 뤼순과 다롄은 뤼다시(旅大市)로 통합됐다. 소련군은 1955년 다롄과 뤼순에서 철수했다. 뤼다시는 1981년 다시 다롄시로 이름을 바꿨다. 1984년 다롄은 13개 연해개방도시에 포함됐다. 다롄의 새 역사가 시작됐다.



# 저우언라이의 휴양지



다롄조선소에서 개조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함이다. 모항은 다롄의 라이벌 도시인 칭다오(靑島)다. [중앙포토]
다롄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인연이 깊다. 그는 다롄을 8차례 방문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봄 중앙보건위원회는 과로에 시달리던 저우언라이의 휴양을 당중앙에 건의했다. 5월 13일 마오쩌둥(毛澤東)의 비준을 받은 저우언라이는 아내 덩잉차오(鄧穎超)와 두 달 예정으로 다롄을 찾았다. 다롄 시내 헤이스쟈오(黑石礁) 인근 청나라 숙친왕(肅親王)의 7남 금벽동(金碧東)의 저택을 개조한 호텔에 머물렀다. 전쟁 중이라 안전을 염려한 비서진은 총리에게 수염을 기를 것을 권했다. 그는 “총리가 어찌 인민을 믿지 못하느냐”며 뿌리쳤다. 다롄의 저우언라이는 ‘약법 3장’을 지시했다. 수행원, 인사 방문, 일정 배려를 엄금했다. 시 간부들은 지척의 총리에게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한광(韓光) 당시 다롄 시장은 어느 날 급히 만나고 싶다는 총리의 전화를 받았다. 총리가 직접 인민정부 2층 시장 사무실로 찾아왔다. 현안을 물어보던 저우 총리는 갑자기 “즉시 전차를 종점까지 다니게 하시오”라고 일갈했다. 당시 다롄시는 총리의 휴양을 위해 시끄러운 전차가 호텔 앞을 지나지 못하도록 조치해 놓았다. 경호인원이 노동자로 변장해 궤도를 수리하는 시늉을 했다. 놀란 시장은 “총리, 다롄은 오랫동안 러시아, 일본의 통치를 받았고,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호텔이 전차정거장 바로 옆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총리는 시장의 말을 끊으며 “시장 동지, 인민을 위한 정치는 우리 당의 영혼이오. 모든 일을 결정할 때 인민을 잊어선 안 되오”라며 다그쳤다. 결연한 총리의 모습에 시장은 바로 정상 운행을 지시했다. 총리는 그제야 “시장 동지가 신속하고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었소”라며 “보통 백성을 대표해서 감사하오”라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훗날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찾아온 제3세계 국빈을 동반하고 다롄을 찾았다. 수수한 평민 총리의 모습은 여전했다.



# 방추이다오 국빈관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臺) 영빈관처럼 중국에는 주요 도시마다 국빈관이 있다. 중앙의 최고 지도자나 정상급 외빈을 위한 숙소다. 다롄의 국빈관은 도심에서 5㎞ 정도 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한 방추이다오 호텔이다. 1959년 둥산(東山) 호텔로 지어진 뒤 1977년 이름을 바꿨다. 2010년 5월 3일 중국을 전격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시내 푸리화(富麗華) 호텔에 묵었다. 환영 만찬 장소만 방추이다오 국빈관이었다. 방추이다오는 홍두깨 섬을 뜻한다. 호텔에서 내다보이는 섬이다. 호텔 앞에는 마오쩌둥의 필체로 새겨진 ‘방추이다오’ 비석이 서 있다. 저우언라이와 달리 마오쩌둥은 다롄 방문을 두 차례 계획했으나 사정이 생겨 모두 취소됐다. 마오와 방추이다오의 인연은 예젠잉(葉劍英) 원수의 한시(漢詩)로 엮여 있다.



 1965년 8월 24일 당시 예젠잉 국방위원회 부주석이 다롄을 군사 시찰했다. 당시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쇠퇴하면서 혁명 수출을 노리던 중국이 의기소침하던 때였다. 유장(儒將)으로 불리던 예젠잉은 호텔 창가에서 가뭇없는 혁명의 기운을 7언 율시 ‘원망(遠望)’에 담았다. 그는 시 앞머리에 ‘다롄 방추이다오에서’라고 적었다. 시를 본 마오쩌둥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해 12월 26일 72회 생일을 맞아 찾아온 차남 마오안칭과 며느리 사오화(邵華)에게 마오는 친필로 쓴 예젠잉의 시를 선물했다. 마오가 쓴 ‘원망’은 1977년 4월 6일자 인민일보 1면에 공개됐다. 다롄시정부는 1995년 국빈관을 리노베이션하면서 마오의 이 시를 떠올렸다. 마오의 방추이다오 비석은 이때 탄생했다.



# 천의 얼굴을 한 도시



다롄은 선망의 도시다. 인구밀도가 낮아서다. 베이징의 절반 수준이다. 부동산의 60%가 외지인 소유다. 다롄 생활은 은퇴자의 로망이다. 해변가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신혼부부의 절반이 외지인이다. 바다에 유골을 뿌리는 이의 3분의 1도 외지인이다.



 다롄은 최첨단 도시다. 미국의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저서 『세계는 평평하다(The World Is Flat)』에서 극찬했을 정도다. 중국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함을 진수시킨 조선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는 세계경제포럼(WEF) 하계대회(일명 하계 다보스포럼)가 다롄에서 열렸다. 지난해엔 톈진(天津)에 개최지를 양보했다. 여자 기마경찰대가 유명하다.



 다롄은 광장의 도시다. 80여 개의 대형 광장을 갖고 있다. 중산, 우호, 항만, 3·8, 승리, 민주, 인민, 5·1, 5·4, 해방, 해군, 희망, 올림픽 광장 등 이름도 다양하다. 천안문 광장보다 넓은 아시아 최대 광장인 싱하이(星海) 광장은 압권이다. 바닷가 싱하이 광장 주변 고급 아파트는 다롄 최고가를 자랑한다. 부동산 불황도 다롄은 예외다.



 다롄은 관광의 도시다. 진스탄(金石灘), 라오후탄(老虎灘) 등의 유명 관광지뿐 아니라, 해산물·포도주·맥주·앵두·사과의 날 등 다양한 축제로 관광객을 유혹한다. 2009년 3517만 명, 2012년에는 4943만 명의 관광객이 다롄을 찾았다. 한국의 지난해 외래 관광객이 1110만 명이었다. 다롄은 한국보다 3배 많은 관광객을 유치했다.



 다롄은 축구의 도시다. ‘축구성’이 또 다른 별명이다. 다롄스더(大連實德) 축구클럽은 중국 프로축구 수퍼리그의 강호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다롄완다(萬達) 시절 55게임 연속 무패를 기록했다. 한국의 안정환이 2009년 입단해 한국에도 익숙하다. 축구는 다롄의 자존심이다.



 하나 더. 다롄은 패션의 도시다. 중국에는 “광저우에서 먹고, 상하이에서 놀고, 다롄에서 입는다”는 말이 있다. 다롄 패션 페스티벌(DFF)은 세계적인 패션 축제다. 지난해 9월 제23회 페스티벌이 열렸다. 뤄양(洛陽)의 모란축제, 하얼빈의 빙등제, 웨이팡의 연축제와 함께 중국의 4대 축제로 손꼽힌다.



 DFF는 보시라이 전 시장의 작품이다. 8년간 다롄 시장을 역임한 보시라이는 다롄을 ‘북방의 홍콩’ ‘화원 도시’ ‘축구성’ ‘패션시티’로 만들었다. 다롄 시민들은 지금도 “공은 공이고, 과는 과”라며 몰락한 보시라이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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