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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34) 71년 광주대단지 사건 ①

서울시의 무차별 이주정책에 반발해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이 시영버스에 올라타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1971년 8월 10일 시간은 정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새로 발령받을 내무부 소속 부이사관급 직원 등 40여 명이 청사 대회의실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 속에 지역개발담당관(이후 새마을담당관)으로 내정된 나도 있었다.

“북한 기자들이 남쪽 오면 취재하겠다는 설까지 … ”



 3년여 만의 내무부 복귀였다. 오치성 내무부 장관은 나를 장관 직속 민원담당관(이사관)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손수익 지방국장은 지역개발담당관(부이사관)으로 같이 일하자고 했다. 한 직급 낮은 자리였지만 난 손 국장의 제안을 선택했다. 장관 측근보다는 현장을 찾아다니며 일하는 자리에 끌렸다.



 그런데 그날 사령장을 주기로 한 오치성 장관은 한 시간이, 두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청와대로 보고하러 갔다고 하는데 소식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사무실로 돌아갔다. 오후 배달된 석간 신문을 봤더니 의문이 풀렸다. 경기도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일대) 사건 때문이었다.



 60년대 후반 서울에 개발 광풍이 불었다. 계기판 없는 불도저식 개발이었다. 무허가 판잣집에 살던 주민들은 최소한의 생계 지원책도 보장받지 못하고 시 외곽으로 쫓겨나듯 이전해야 했다. 철거민들을 거여·상계동과 시흥 등지에 강제이주시켰지만 땅이 부족했다.



 68년 5월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에 이주민을 위한 주택·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년 만인 69년 5월 바로 철거민 등을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선(先)입주, 후(後)투자란 명목 아래 ‘실어다가 들이붓는’ 비인간적인 이주 대책이 시행됐다. 이주 2년여가 지나자 인구는 웬만한 시·군 규모인 14만 명으로 늘어났고 누적됐던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71년 8월 10일 오전 양택식 서울시장이 광주대단지 현장을 찾아 주민과 직접 대화할 예정이었다. 약속한 시간에 양 시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갑자기 비까지 쏟아졌다. 야외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은 격분했고 결국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60~70년대 수도권 철거 이주사에서 대표적 비극으로 꼽히는 광주대단지 사건은 그렇게 발생했다.



 난동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지자체 관할이었던 광주단지 업무를 내무부로 이관했다. 지역개발담당관, 바로 나에게 책임이 맡겨졌다.



 사령장도 안 받았지만 그날 밤을 새우면서 실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웠다. 정식 발령을 받고 전석홍 내무부 도시개발관(이후 도시지도과장)과 광주단지로 향했다. 지역개발담당관 산하 도시개발관이 실무를 맡고 있었다.



 단지 내 광주군 중부면 출장소를 먼저 찾았다. 현장은 참혹했다. 도로나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곳에 천막과 판잣집만 빼곡했다.



 당시 도시개발관이었던 전석홍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은 현장을 목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도시 생활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장지대를 만들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 완공되기 전이어서 일거리가 거의 없었어요. 서울과의 거리는 12㎞ 정도로 멀지 않았지만 교통이 워낙 불편했습니다. 그래도 먹고살 길이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에 일하러 가고 낮에 판잣집이나 천막 안에는 노인이나 아이들뿐이었죠. 당시 북한에서 기자들이 남쪽에 오게되면 광주단지를 취재하겠다고 밝혔다는 설까지 돌았습니다. 광주대단지 문제를 자기들의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고 말입니다. 당국자로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이때부터 전 개발관과 함께 매일 현장에 출근하다시피 했다. 현장 일을 맡으면 제일 후미진 곳까지 가보는 게 내 버릇이다. 하루는 남한산성 너머 산 중턱에 있는 한 마을을 찾았다. 광주대단지 내 철거민 이주촌 중 하나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영세민들이 연고도,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곳에 쫓겨왔다. 당연히 빈곤 문제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치안도 형편없어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였다.



 안내하던 사람이 나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마을에서 굶주림 때문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돕니다.”



 비통함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민심이 흉흉했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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