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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들 …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시청의 낡은 문기둥 옆에 선 채 게이조는 아직도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요코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게이조는 코트 깃을 세웠다. ‘본심은 요코를 사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쓰에에게 범인의 자식을 키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배반하고 무라이와 밀통한 나쓰에 때문에 그날 루리코는 살해되었다. 나는 그런 나쓰에가 요코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괴로워할 날을 위해 그 아기를 데려온 것이다. (…) 나쓰에의 부정을 일시적인 마음의 방황으로 돌리고, 어떻게든지 용서할 수는 없는가? 한 번은 나도 용서를 했다. 루리코의 죽음을 미칠 듯이 슬퍼하는 나쓰에를 나는 용서했다. 그러나 진심으로 루리코의 죽음을 슬퍼했다면 또다시 무라이의 품에 안겼을 리가 없다. (…) 무라이도 내가 나쓰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나를 나쓰에와 무라이는 배신했다.’ 나쓰에의 흰 목덜미에서 본 보랏빛 반점이 지금도 게이조의 가슴에 아프도록 깊이 새겨져 있었다.

미우라 아야코 (三浦綾子, 1922~1999) 7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자 국가의 기만성에 좌절하여 교직을 그만두었다.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잡화점이 번창하여 이웃 가게에 지장을 주자 가게 규모를 줄이고 남는 시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64년 당시 가장 큰 상금이었던 ‘아사히 신문’ 1000만 엔 현상공모에 소설 『빙점(氷點)』이 당선되어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시청에 서 있는 낡은 문기둥처럼 어느 남자가 차갑게 변하여 얼음이 되고 있다. 얼음은 주위의 것을 얼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래서일까, 이미 얼음이 되어 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자신의 마음을 싸늘하게 얼려 버린 여자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가장 차갑게 얼릴 수 있을까? 미우라 아야코의 베스트셀러 『빙점(氷點)』은 무엇보다도 먼저 얼음처럼 차가워진 사람들이 마침내 어떻게 서로를 얼려 버리는지, 그 화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보고서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병원 원장 게이조는 아내 나쓰에의 배신으로 차갑게 얼어 버린 얼음이 되어 버렸다. 나쓰에가 무라이라는 젊은 의사와 연정에 빠지는 날, 어린 딸 루리코는 참혹한 시체로 변하고 만다. 무라이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세 살 딸에게 나가 놀라고 방치해서 벌어진 사건이다.

아내의 행동을 한때의 열정이라고, 부주의한 실수라고 용서할 생각도 있었다. 그렇지만 게이조의 조그만 기대는 속절없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딸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에게서 키스 마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토록 마음을 산산이 찢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인가. 게이조라는 남자는 복수심에 치를 떤다. 용서하려는 마음은 일순간에 냉각되고 그 자리에 잔혹한 복수심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스피노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복수심(vindicta)은 미움의 정서로 우리에게 해악을 가한 사람에게 똑같은 미움으로 해악을 가하게끔 우리를 자극하는 욕망이다.”(스피노자의 『에티카』중)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녀가 밉다. 이것을 씻을 수 있는 방법은 당한 만큼 그대로 그녀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마침내 남자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어떤 방법이 좋을까? 게이조가 마침내 생각해 낸 방법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딸 루리코를 죽이고 자살한 살인마의 딸(요코)을 입양하겠다는 계획이다. 마침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나쓰에가 루리코의 빈자리를 대신할 여자아이를 입양하겠다고 남편을 조르고 있던 참이다. 언젠가 아내가 딸을 죽인 범인의 딸을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녀도 자신처럼 싸늘한 얼음처럼 변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빙점’은 액체가 고체로 결정되는 온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미우라 아야코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언제 인간의 마음이 얼음처럼 차갑게 응결되는지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수심이다. 사실 자신에게 가해진 해악에 대처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딱딱한 얼음처럼 만들어 놓는 것이 좋다. 부드러운 마음은 타인이 가하는 해악으로 지독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복수심의 이면에는 자신의 상처를 급속 냉각시키려는, 그래서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모종의 의지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빙점’이 동시에 ‘융점(融點)’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물이 0도에서 냉각되어 얼음이 되듯이, 얼음도 0도에 풀려서 물이 되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복수심이라는 빙점이 동시에 융점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소설의 초반부 어느 한 대목에서 미우라 아야코는 그 실마리를 넌지시 보여 준다.

“게이조는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학생 시절이었다. 나쓰에의 아버지인 쓰가와 교수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여러분은 독일어가 어렵다느니 진단이 어떻다느니 하고 불평들을 하지만 나는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만큼 어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네. 웬만한 일은 노력하면 할 수 있지. 그러나 자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네. 노력만으로는….’”

그렇다. 용서다. 배신한 아내를 용서하는 것, 그것만이 마음을 얼음처럼 굳어지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쓰가와 교수의 말처럼 그것은 “노력만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복수심이 어떤 파국을 가져오는지 하나하나 처절하게 경험해야만 빙점이 융점으로 변하는 것 아닐까? 소설 『빙점』이 복수심이 만드는 차갑고도 날카로운 상흔들을 응시하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강신주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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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