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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어느 항아리의 최후진술

이영종
정치부문 차장
이런 비참한 운명을 미처 예감하지 못했습니다. 9개월의 짧은 삶을 여기서 마감해야 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제 이름은 통일항아리. 지난해 6월 23일 경북 문경의 영남요에서 화려하게 탄생했죠. 높이 51㎝에 몸통 지름이 50㎝인 단아한 몸매에 꿀피부를 가진 백자입니다. 저를 빚어낸 류우익 도공(당시 통일부 장관)은 “통일 준비를 위한 국민 의지와 정성을 담을 보물단지”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많은 분이 제 이름을 불러주고 힘을 주셨죠. 전남 고흥의 어르신 33분은 하루 300원짜리 커피 값을 아껴 모은 2200만원을 선뜻 보태기도 하셨죠.

 잘나가던 저의 운명에 날벼락이 떨어진 건 그제 오전. 사실 아침 일찍까지도 전 희망에 부풀어 있었죠. 정부가 바뀌고 주무장관이 달라졌지만 통일 준비는 중단 없이 계속될 거란 믿음에서였습니다. 이날 통일부의 청와대 업무보고 자료에도 저의 법적 지위를 단단하게 해줄 ‘남북협력기금법’의 개정이 주요 과제로 담겼습니다. 연간 수천억원의 협력기금 중 쓰고 남은 돈을 통일 대비 재원으로 적립해 통일항아리를 채워 가는 걸 뒷받침하는 법안입니다.

 하지만 대통령님의 말씀 한마디에 모든 건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부채도 많은데 어디 쌓아놓고만 있을 수 있는 형편이냐”며 재원 적립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신 겁니다. 제겐 사형선고와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통일이 이뤄질 때 가서 국제금융기관이 투자와 대출을 할 수 있게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대통령님의 주문이지만 전 솔직히 서운한 생각이 앞섭니다.

 이럴 거라면 왜 지난달 대통령직 인수위 결산 때 통일항아리 사업의 계속 추진을 약속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달여 만에 제가 갑자기 눈 밖에 나게 된 속사정도 궁금하고요.

 못 미더운 건 영원한 저의 수호천사가 될 것처럼 말하던 통일부 간부님들입니다. 새 대통령의 추상같은 말씀에 장관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저를 대변할 한마디를 못했습니다. 쉬쉬하고 넘어가려다 청와대 대변인의 소상한 브리핑 때문에 들통나자 “청와대가 언론에 너무 친절한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내더군요. 류우익 장관 퇴임식에서 돌아오자마자 간부들이 가슴에 달고 있던 통일항아리 배지를 떼어 던질 때 뭔가 알아차리지 못한 제가 아둔했던 걸까요.

 저는 지금 세종로 정부 서울청사 4층 복도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전용 유리 케이스와 할로겐 조명이 곁들여진 최고의 인테리어도 이젠 쓸모가 없습니다. 며칠 내로 전 소리소문 없이 퇴출당하겠죠. 대통령으로부터 낙인찍힌 천덕꾸러기가 됐으니 명예로운 퇴진은 힘들 듯합니다. 어두운 청사 창고 구석에서 이가 빠져가거나 김칫독으로 쓰이는 건 아닐지.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미 국민 성금으로 거둬들인 6억여원을 어떻게 할지도 난감합니다. 참, 제가 이런 걱정을할 때가 아니군요. 고통스럽지 않게 항아리가 안락사할 수 있는 방법이나 인터넷에서 찾아보렵니다. 부디 바라건대 다시는 저같이 불행한 항아리는 나오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영 종 정치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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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