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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29) 부친이 내린 공직3계

손자를 안고 웃고 있는 고형곤(왼쪽) 전 민정당 의원. 사진 속 두 아이는 고건 전 총리의 큰아들 진(오른쪽·현재 52세)과 둘째 아들 휘(가운데·51세)다. [고건 전 총리 제공]

내무부 수습 행정사무관으로 첫발을 내디딘 1962년. 아버지는 내게 ‘공직삼계(公職三戒·공직자로서 지켜야 할 세 가지)’를 내려줬다. 첫째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찍히지 마라’, 둘째 ‘남의 돈은 받지 마라’, 셋째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였다.

 먼저 아무개 사람이라고 찍혀선 안 된다는 것은 줄 서지 말고 실력으로 헤쳐가란 뜻이었다. 나는 공직 생활을 통해 인사 운동을 하거나 어느 정파에 줄을 선 일이 한 번도 없다. 대신 일로서 승부하려면 내가 맡은 일에선 최고의 전문가가 돼야 했다. 일이 주어지면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가 정치인을 그만두고 나서도 지킨 원칙이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다. 감천까지는 못돼도 감민(感民)은 하자는 ‘지성감민’은 그때부터 내 좌우명으로 자리 잡았다. 두 번째 뇌물을 받지 말라는 청렴의 원칙도 마찬가지다. 강경 야당 정치인의 아들로서 청렴은 나에게 생존의 법칙이었다. 그러다 보니 청렴이 체질화됐고 나중엔 경쟁력이 됐다. 권력의 판도가 바뀌고 사정(査正) 바람이 휘몰아칠 때도 떳떳이 내 소신대로 일할 수 있었다. 12·12 사태 이후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반대해 사표를 던질 수 있었던 것도 내 스스로 청렴을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1975년 11월 전라남도 지사에 임명됐을 때 일이다. 37세 나이에 최연소 도지사였다. 의욕이 가득한 젊은 공직자 주변에 검은 돈의 유혹이 끼칠 만도 했다. 아버지는 일가친척을 긴급 소집했다. ‘비상계엄 가족회의’였다. 친척 모두에게 청탁이나 돈을 절대 받아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도지사 생활을 하다 보면 돈이 아쉬울 때가 있었다. 밤 9시가 넘어서도 불이 켜져 있는 도청 사무실이 적지 않았다. 그럼 사무실로 올라가서 야근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 광주 충장로에 가서 대포 한잔을 같이 했다. 공식 예산은 부족했다. 나의 사정을 예감했는지 아버지는 도지사 생활을 할 때부터 그때 내 월급의 세 배 정도 되는 돈을 매달 부쳐줬다. 친척들에게 갹출해서 만든 돈이었다. 오랜 공직생활에서 청렴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술에 대한 아버지의 세 번째 조언은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체질 때문인지 술의 양에 대한 문제는 도리가 없었다. 물론 ‘술을 먹더라도 자세를 흩뜨리지 말라’는 계명이라면 어느 정도 지켰다. 동료 직원들과 소주와 막걸리를 자주 했다. 사무실에서 듣지 못하는 진솔한 얘기를 그 자리에선 들을 수 있었다. 도지사를 제대로 하려면 면서기와도 술 한잔을 같이해야 소통이 되지 않는가. ‘술 잘 먹는다’는 소문은 막을 수 없었다.

 대신 공직삼계 중 세 번째 수칙을 ‘일일신(日日新·매일매일 새롭게 함)’으로 바꿨다. 달라지는 행정 환경에 따라 스스로를 늘 새롭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세상이 바뀌면 행정 환경도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 맞춰 일하는 방식과 행정 사고 모두 늘 새롭게 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공직에 가든지 한 가지 이상은 반드시 새롭게 고쳤다. 행정의 지속적인 혁신(Innovation)이 바로 일일신이다.

 내가 기획계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난 1967년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직 임기를 마치고 정치인의 생활을 접었다. 다시 학자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정치인의 길을 접으면서 내 앞에 행정가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공직생활을 당신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방편으로 생각하셨다. 내가 수행하는 정책에 대한 건전한 비판자,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해주셨다. 내가 공직에 있을 때 아버지는 나의 파트너였다.

정리=조현숙 기자

◆ 이야기 속 인물- 고형곤

고형곤(1906~2004)=동아일보 기자를 하다가 1938년 교수가 됐다. 연세대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54~55년 한국철학회 초대 회장을 지낸 한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59~60년 전북대 총장을 역임했고 제6대 국회의원(군산·옥구)으로도 활동했다. 정치인 시절 야당인 민정당의 정책위 의장과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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