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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존재 인정, 공존·화해 이룬 다원사회 … 통일한국의 본보기

한국사의 특징 중 하나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왕조들이 장기간 지속된 점이다. 고구려·백제가 700년, 신라가 1000년을 지속했다. 고려와 조선왕조도 500년간 이어진 장수왕조였다.

다른 왕조는 논외로 하고, 고려가 장수한 원인은 무엇일까? 30년간 거란·몽골의 이민족 침략을 당하고도 왕조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팔만대장경 같은 찬란한 문화유산을 향유한 저력은 무엇일까? 필자는 고려의 ‘다원사회(多元社會)’적 특성에서 답을 찾으려 한다. 이는 한국사의 역대 왕조가 경험하지 못한, 고려만의 특성이다.

다원사회는 다원주의(多元主義) 이념에 기반한 사회다. 사회의 다양한 실재(實在)를 인정하고 공존함으로써 국가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는 세계관이다. 골품제로 운영된 신라, 성리학으로 유지된 조선은 일원적 사회였다. 반면 고려는 정치·경제·사상면에서 다양한 실체를 인정하는 가운데 이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통합력을 발휘했다.

종교를 보더라도 고려는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신앙이 공존했다. 문화 역시 고려청자·금속활자 등 세련된 중앙문화와 역동적인 지방문화가 공존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는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을 자부하고 주변 이민족들에게 자존감을 과시했다.

고려 다원사회의 또 다른 특성은 개방성과 역동성이다. 벽란도 등 서해안 일대는 당시 동아시아 무역이 번성한 곳이며, 송·거란·여진뿐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 고려는 또 능력 있는 인재라면 국적·종족을 불문하고 관료로 등용했다. 이런 개방성을 바탕으로 고려의 국력은 융성했고 대외 교역이 가장 활발했던 12세기엔 독자 문화를 꽃피웠다.

또 고려는 우리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하층민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했다. 신분이동이 상대적으로 쉬운 역동적인 사회였다. 반면 신라는 삼국통일 뒤 고구려·백제의 인적 자원을 배제한 채 진골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제 사회를 고수해 진정한 국가통합에 실패했다.

고려 건국 당시 지방세력은 각자의 정치·문화를 영위한 소왕국의 군주와 같았다. 고려왕조는 이들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인정해 주는 한편 그들의 협조를 얻어 사회를 통합하고 왕조를 유지했다. 이런 타협·공존의 정신 덕에 고려왕조는 통일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동아시아는 당 제국(618∼907년)의 붕괴로 힘의 공백상태였다. 패권을 둘러싸고 고려·거란·송나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종족 간 이동과 전쟁이 빈번했다. 고려는 고조선·고구려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통치 영역으로 삼고, 다양한 종족을 받아들여 ‘다민족(종족) 영역국가’를 지향했다. 통일신라와는 다른 개방국가 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남북 분단과 지역갈등을 해결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 공존과 화해를 이뤄낸 고려왕조의 다원사회 경험은 통일한국을 위한 유용한 자산이 될 것이다. 1000여 년 전 고려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박종기 경북 경주 출생. 1975년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 중세사회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심여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역사연구회 회장을 역임했다. 역사와 현실의 일체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역사학 수립에 관심을 가져왔다. 주요 저서로 『고려시대 부곡제 연구』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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