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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보르헤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251쪽, 1만1000원


1990년대 초에 기호의 수열로 이루어진 도서관을 상상한 적이 있다. 발상은 단순했다. 원고지 한 장에 200자. 그 정도 분량이면 인류가 이제까지 이룩한 모든 발견의 요지를 요약하는 데 크게 지장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모음과 자음의 결합이 아무리 다양해도, 그 경우의 수는 결국 유한수. 그렇게 이뤄진 텍스트는 대부분 무의미한 기호의 결합에 그칠 것이나, 그 텍스트 무더기 속에 가끔은 이런 말도 끼어 있을 게다. ‘생물은 진화한다’ ‘E=MC2’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등등.

 나중에 이미 수십 년 전에 누군가 똑같은 발상을 내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로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이다. 나와 보르헤스의 첫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 후로도 우연한 만남은 계속됐다. 90년대 중반 국내에 선보였다가 2년 전 새로 번역된 『픽션들』을 다시 꺼내든 이유다. 따끈따끈한 신간은 아니지만 자꾸자꾸 부딪히게 되는, 여느 신간보다 자극이 되는 책이다.

 예컨대 언젠가 18세기 이탈리아의 동판화가 피라네시의 ‘감옥’ 연작을 보다가, 그 중의 한 장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기시감의 근원은 보르헤스의 ‘신의 글’이었다. 거기서 마술사 치나칸은 감옥에서 거대한 바퀴를 본다. 피라네시가 그린 환상적인 감옥에 있던 바로 그 바퀴다.

 『픽션들』에는 총 17편의 단편이 실렸다. 1940년대 작품이 대부분인데 전혀 낡아 보이지 않는다. 21세기 사회와 문화를 비춰보는 데 전혀 모자람이 없다. 상상력의 저수지라 불리는 보르헤스의 힘이다.

 가령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오랜 각고 끝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구두점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베낌으로써 완전히 다른 텍스트를 창조해낸 어떤 저자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서로 대립하는 극단적 예를 본다. 즉 동일한 텍스트라도 그것이 처한 콘텍스트에 따라 완전히 다른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언어 관념이다.

 평소 우리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기존의 낱말을 동일한 의미로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 한 번만 사용되는 기호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용된 낱말이 반복되는 것은 매번 상이한 맥락 속에서다. 한 낱말을 동일한 의미로 반복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미세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 미세한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낱말의 의미 자체가 변하게 된다. 이렇게 언어는 반복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낸다.

 또 ‘원형의 페허’는 밤마다 꿈을 꾸어 아이의 형상을 빚는 어느 늙은 사제의 이야기다. ‘불’의 신은 그 꿈의 형상을 현실의 아이로 바꾸어 준다. 꿈으로 빚은 아들은 아비처럼 또 다른 사원에서 불의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노인은 어느 날 지나는 행인들로부터 저 아래의 사원에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현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은 그가 아들임을 직감한다. 어느 날 노인의 사원에도 화재가 일어난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그는 문득 자신의 몸도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1929~2007)의 『시뮐라크르와 시뮐라시옹』을 연상시킨다. 보드리야르에게 ‘실재’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라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거대한 시뮐라시옹, 즉 시뮐라크르라는 미디어의 이미지로 구축된 가상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단편에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현실의 노인은 꿈이라는 가상의 이미지로 아들을 빚은 후, 아들이 행여 그 탄생의 비밀을 알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에서 결국 노인 자신도 그 누군가 꿈으로 빚은 가상의 이미지로 드러난다. 흔히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보르헤스 문학의 정체다.

 이 일치가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보르헤스의 단편은 60년대에 불어로 번역돼, 지식인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다. 60년대는 우리가 포스트모던의 사상,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이 막 형성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보르헤스의 문학적 상상력이 프랑스에서 철학적 상상력으로 변용됨 셈이다. 따라서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이미저리의 원형이 된 보르헤스를 읽는 것이 좋다. 보르헤스의 단편은 쉽고, 그러면서도 깊다.

 보스헤스 사후 수십 년 후에 전개된 디지털 문명을 예언하는 듯한 작품도 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다. 공간은 없고 시간만 존재하는 ‘틀뢴’은 초기의 사이버스페이스를 닮았다. 초기의 틀뢴처럼 인터넷 역시 초기에는 비밀결사를 연상시키는 몇몇 전문가 그룹만의 국지적 현상이었다. 월드와이드웹(www)과 더불어 인터넷은 비로소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규모로 확장된다. 이는 틀뢴이 ‘나라’에서 ‘행성’의 규모로 진화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또 2000년 이후 모바일 환경이 진화하며 대두한 증강현실은 어떤가. 증강현실의 기술은 가상의 객체를 불러와 현실의 층위에 중첩시킨다. 보르헤스도 이 단편의 말미에서 환상의 세계에서 온 대상들이 현실세계에 침투하여 그것과 어지럽게 뒤섞이는 현상을 묘사한다. 환상의 세계에 속하는 틀뢴의 대상들이 현실의 공간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이 역시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닌가. 이렇듯 보르헤스의 소설은 디지털 매체철학으로도 확장된다. 어떤가. 숱한 작가와 지식인에게 영감을 주었던 보르헤스와 대면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서울대 미학과(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1~3』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등.

◆ 보르헤스는 …

아이디어의 보석상자, 소설 쓰는 철학자, 현대 소설의 패러다임을 창조한 천재, 20세기 문학의 명제를 예지한 거장, 현실을 전복하는 초현실과 실재에 침투하는 허구의 마술사…. 이 사람을 한마디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곤혹 속에 길을 잃는다. 미국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났는데 다시 뒤집어 첫 페이지를 열면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이야기의 미궁이 펼쳐진다. 고전에 대한 정의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또는 못하는) 책’이라면 이 작가의 작품이야말로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의 한마디는 보르헤스 문학의 핵심을 꿰뚫는다. “내가 작성한 ‘현대의 고전’이라는 목록의 첫 번째 란에 보르헤스의 이름을 주저하지 않고 써넣는다.”

 1899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1986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타계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의 무대로 끌어올린 작가다.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와 나란히 전위적인 모더니즘 문학 세계를 일궜다. 특히 1944년 펴낸 『픽션들』은 수세기 동안 논의되어 온 세계 철학과 다양한 문학 장르를 응축해 놓은 일종의 수수께끼다. 그 지적 장치는 혼돈과 질서가 맞물려 돌아가는 무한한 우주에서 진리의 빛을 찾는 등불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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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