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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핵무기, 그 파괴적 유혹

이철호
논설위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마지막 운명을 얼핏 예감한 듯 보인다. 그해 1979년의 장마는 대단했다. 온 나라가 물에 흠뻑 젖었다.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7월 1일, 단 하루만 반짝 햇살이 났다. 하지만 회담에 배석한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최악의 회담이었다”고 고백했다. 밴스는 “우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박 대통령은 45분간 주한미군 철수를 반박하는 성명을 읽어나갔다”고 했다. 비공개 단독 정상회담은 더 심했다.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다시 핵무장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갔다. 울적해진 박 대통령은 이틀 뒤 오랜 측근을 청와대로 불러 술잔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임자, 어쩌면 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일 듯싶네.” “무슨 그런 나약한 말씀을 하시느냐”는 만류에 박 대통령은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아니야, 핵무기는 전혀 다른 차원일세. 그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겠지?”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모셔온 이 인사는 그의 낯빛이 한 번도 본 적 없을 만큼 어두웠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석 달 뒤 10·26사건이 일어났다. 핵무기와 이 비극의 인과관계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인사는 오랫동안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핵무기는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양날의 칼”이라 했다.

 백선엽 장군은 3년 전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중앙일보에 연재했다. 6·25 전쟁의 생생한 회고담이다. 그는 지면에 싣지 못한 이야기를 사석에서 중앙일보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백 장군은 50년 동안 왜 김일성이 남침을 했는지 혼자 곰곰 따져보았다고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은 딱 하나야. 그가 사단 병력만 지휘해 봤어도 결코 전면전을 벌이진 않았을 거야. 소대나 중대 단위의 게릴라 전투가 전부였으니…. 큰 전투를 경험했다면 모험주의에 빠져 무모한 전쟁을 일으킬 리 없지.” 철학자 데이비드 흄도 경험이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다.

 이 두 장면을 떠올린 것은 연일 도를 넘는 북한의 핵 위협 때문이다. 갓 핵실험을 한 나라가 “핵 선제타격 권리를 행사하겠다”고 하는 경우는 난생처음이다. “서울뿐 아니라 워싱턴까지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 저주를 퍼붓는다. 그렇다면 북한의 핵 공격은 가능할까? 이성적인 기준에선 불가능하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은 핵 보유국이 비핵 국가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소극적 안전보장을 의무화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255호는 비핵 국가가 핵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핵 보유국들이 즉각 개입해 보복하도록 못박고 있다. 핵우산을 의미하는 적극적 안전보장 조치다. 따라서 핵 단추를 누르는 순간 가장 많이 잃는 쪽은 지도상에서 가족정권이 사라질 북한일 것이다.

 윤덕민 국립외교원 교수는 북한 핵무기를 내부 통치용으로 본다.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던 93년과 닮은꼴이다. 그해 연초부터 3월까지 준전시 상태 선포와 NPT 탈퇴 등 벼랑 끝 전술로 갔다. 김정일이 4월 국방위원장에 오르면서 갑자기 국면이 달라졌다.” 윤 교수는 “김정은 입장에선 핵과 미사일이 체제를 결속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진단한다. 긴장 강도를 최고로 높이는 까닭도 한국·미국보다 북한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변수는 남아있다. 우선, 스물아홉 살 김정은의 경험 미숙이 언제 합리적 판단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사납게 짖는 개는 물지 않지만, 미친 개는 막무가내로 덤비는 법이다. 국제사회 분위기도 예전과 판이하다. 세계 유력 언론들이 연일 북한 핵 기사를 다룰 만큼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어제 미 백악관은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 핵 문제에 몰두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 역시 북한 은행들의 불법 영업을 금지시키는 등 예전과 온도 차가 느껴진다. 북한의 의도대로 국제적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유일한 근본적 해법은 ‘북한의 체제 전환’이란 소리가 나올 만큼 유동성도 커졌다.

 우리로선 별수가 없다. 핵우산이 찢어지지 않도록 한·미 동맹을 다지고, 중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두텁게 할 수밖에 없다. 중국에 북한이 ‘자산’인지, 아니면 ‘부담’인지 고민하게 해야 한다. 북한은 NPT체제가 발효된 1970년 이후 핵무기를 개발하고, 핵 공격을 위협하는 유일한 나라다. 마지막 핵 공갈이 통할지, 아니면 서서히 망해갈지 북한은 갈림길에 섰다. 핵무기는 파괴적 유혹을 부르는 양날의 칼이다. 지난 40여 년간 스스로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은 나라치고 개발 주역들이 테러나 암살의 비극적 운명을 맞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어쩌면 북한도 핵무기를 끌어안고 파멸을 재촉하는지 모른다.

이 철 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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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