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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은 3년만 돼도 구닥다리 신세 예능은 600년 지나도 새로울 수 있죠

선이 고운 용모와 울림이 있는 저음의 목소리에서 스며 나오는 고요한 카리스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독특한 매력으로 ‘항상 땅에서 몇 ㎝ 떠 있는 존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이 남자의 정체는 교겐사(狂言師) 노무라 만사이(野村萬斎·47). 600년 역사의 일본 고전예능 교겐(狂言)에 제 2의 붐을 불러온 ‘교겐계의 프린스’다.
교겐은 노(能), 분라쿠(文樂), 가부키(歌舞伎)와 함께 일본의 4대 예능으로 꼽히는 장르. 그는 정통 교겐은 물론 교겐의 문법에 현대극을 입힌 새로운 무대미학을 창조해 세계를 누비는 한편 영상물에서도 활약하며 잊혀져 가는 고전예능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는 ‘고전예능 전도사’다.
3년 전 국립극장이 주최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에 참가해 3대가 함께 하는 정통 교겐을 선보인 그가 이번에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교겐의 세계관으로 재구성한 현대극(3월 15~17일 명동예술극장)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고전이라는 양식의 틀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는 아티스트로서 자신만의 틀을 어떻게 구축하고 있을까? 그가 주최한 교겐 워크숍에 직접 참가한 뒤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13일 오후 3시 명동예술극장 지하연습실. 이날 오전 11시30분쯤 입국한 노무라 만사이의 첫 공식 일정이 시작됐다. 교겐 워크숍이다. 사전 모집된 한국인 배우들에게 교겐의 정신과 기본동작을 전수하는 시간이다.
교겐은 항상 “이 부근에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 소개로 시작된다. 이름이 없는 것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통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장소와 스승, 자신에 대한 예를 갖추는 절을 올린 뒤 바닥을 깨끗이 걸레질부터 한다. 걸음걸이, 따라 웃기, 두 사람이 주고받는 간단한 연기 테크닉들이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워크숍을 관통하는 원리는 ‘서(序)·파(破)·급(急)’. “자동차 시동을 걸어 서서히 기어를 올려 질주하는 과정을 모든 연기에 적용하는 것이 교겐”이라는 노무라는 “교겐의 테크닉으로 푼 맥베스도 전체적인 구조상 그런 원리가 적용됐다”며 느리고 지루해만 보였던 교겐의 세계를 리드미컬하게 보여줬다. 두 시간 동안의 짧은 체험이지만 교겐의 정신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에 해외공연 때마다 비중을 두는 프로그램이다.
교겐은 중세부터 이어져 온 노 공연의 막간극이다. 노가 신화나 설화를 소재 삼은 비극임에 비해 누구나 공감하는 보통사람의 행동을 코믹하게 표현하는 희극이라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영상물의 발달로 고전 예능 전체가 관객의 외면을 받는 위기 상황이 발생했고,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 바로 노무라 만사이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 비친 그의 모습에 반한 20대 여성들 사이에 교겐 붐이 불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하는 그의 무대에 대한 평단의 관심과 기대도 높아졌다.

‘맥베스’ 수많은 등장인물을 단 5명이 연기
‘맥베스’는 교겐의 세계관으로 풀어낸 셰익스피어 극이다. 그는 1994년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에 유학을 다녀온 이후 셰익스피어와 교겐을 접목한 무대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직접 연출한 셰익스피어 첫 작품 ‘실수연발의 교겐(2001)’은 ‘실수연발의 희극’에 교겐의 양식을 완벽히 적용한 무대로 런던 글로브좌 공연에서 극찬을 받았다. ‘리처드 3세’의 배경을 일본 전국시대로 설정한 ‘나라를 훔친 자(2007)’는 교겐·경극·가부키·코메디아 델라르테 등 각종 고전이 교차하는 독특한 무대로 선보였다. 그는 “교겐을 쉬면서 창작 활동을 하는 것이니 600년 전통으로 숙성된 교겐에 지지 않을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고 세계에 통할 만한 작품이어야 한다. 해외투어는 보다 정제된 결과물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전 예능의 창작력을 어떻게 살릴까 하는 문제”다. “동양고전이 주목받기 위해서는 이런 세계 공통의 희곡을 통해 그 우수성을 알려야 한다. 해외공연에서 교겐 특유의 테크닉을 교겐으로만 보여주면 문화의 차이를 느끼는 데 그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라는 보편적인 콘텐트에 적용하면 교겐의 개성과 가치를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맥베스의 마녀를 표현할 때도 가면 사용에 탁월한 우리의 방식이 서양의 표현력보다 월등함을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맥베스’는 2010년 초연작이지만 이번 해외투어를 겨냥해 전혀 새로운 연출로 다듬었다. 그는 “해외투어인 만큼 교겐의 본질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며 “무대 자체도 초연에서는 쓰레기장 같은 지구를 구체적으로 보여줬지만 이번에는 다 생략하고 원래 교겐 무대처럼 단순화했다. 원작의 수많은 등장인물을 단 5명이 연기하는 것도 교겐 특유의 생략·응축의 미학”이라고 말했다. 이는 상상력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하게 다 보여주는 게 아니라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맥베스’를 통해 사고해야 할 테마는 인간 행위의 양면성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왕위에 오르려는 맥베스의 욕망이 우주에서 봤을 땐 매우 하찮은 것이라는 진리다.
“인간을 삼라만상의 일부로 부감하는 교겐의 거시적 시선과 인간의 정신성에 다가가는 노의 미시적 시선을 교차시켜 ‘인간 대 삼라만상’의 대립구도를 뚜렷이 드러내려 했다”는 설명이다.
“내일을 생각하는 것은 인간뿐이지만, ‘깨끗한 것은 더럽고, 더러운 것은 깨끗하다’는 맥베스의 대사처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만든 플러스의 재산이 오히려 마이너스의 재산을 낳기도 한다”는 노무라의 설명은 대지진의 경험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은 내일을 쾌적하게 하기 위해 자연계에 없는 원자력 같은 것을 만들었지만 결국 엄청난 폐기물까지 생산하고 말았다. 지진 전에 만든 작품이지만, 자만하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존재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무척 키치적이고 놀랄 만큼 생략적인 예술
대지진 이후 기획한 무용 ‘볼레로’도 화제가 됐다. 20세기 남성 발레의 상징으로 꼽히는 모리스 베자르의 ‘볼레로(1960)’를 교겐의 ‘산바소(三番叟·경축을 위한 독특한 교겐으로 신을 향해 오곡 풍요를 기원하는 춤)’로 풀어낸 것. ‘볼레로’가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다시 뜨길 기원하는 일본의 원시무용 ‘아메노우즈메노미코토(天宇受売命)’를 연상시킨다는 점에 착안해 남성 무용수 40명의 군무에 오케스트라 연주를 더한 생명력 넘치는 무대로 빚어냈다.
“대지진 직후 도호쿠 지방에서 자선공연을 한 실비 기엠의 볼레로에 자극받아 나 역시 구제, 구원을 염원하는 마음을 볼레로에 담았다. 전통에 기초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발레의 영향도 받고 지금껏 내가 길러온 새로운 틀을 만들어 안무했다. 전 세계 누구나 알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교겐을 어필하기에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교겐은 전위적인 현대미술과도 어울리는 ‘오래된 미래’다. 그는 3월28~29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세계적인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와 함께 ‘SANBASO-divine dance:MANSAI NOMURA+HIROSHI SUGIMOTO’라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현대미술의 상징 구겐하임을 극장 삼아 스기모토가 디자인한 무대와 의상을 활용해 ‘산바소’를 추는 것. 2월 시작된 20세기 일본 전위미술 그룹인 구타이그룹 특별전 ‘Gutai: Splendid Playground’의 일환으로, ‘전통예능현대미술’의 협업을 통해 일본문화의 근원적 전위성을 주장하는 작업이다. “3년 전의 휴대전화는 낡았지만 600년 전의 예능은 새로울 수 있다. 교겐은 상당히 키치적이고 놀라울 만큼 생략적이다. 그런 전위성 때문에 현대작가의 튀는 예술 세계와도 만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를 고민할 때 우리의 방법론 안에 있는지 찾고, 없다면 새로운 틀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뭐든 같이 섞으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맥베스’(2013) photo by Jun Ishikawa
노무라 만사이 1966년생. 교겐 이즈미류의 교겐사. 배우이자 연출가. 교겐계의 대부이자 인간국보 노무라 만사쿠(野村万作)의 장남으로 태어나 3살 때 데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란’(1985)에 출연했고, 97년 드라마 ‘아구리’로 폭넓은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2001년 영화 ‘음양사’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일본아카데미 신인상을 수상했다. 세계적인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의 ‘오이디푸스왕’(2002) 등 현대극에도 출연하며 국내뿐 아니라 런던·아테네·뉴욕 등 해외무대에 올랐다. 2002년 고전예능 전수자로서는 최초로 공공극장인 세타가야 퍼블릭시어터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래 현대극의 문법을 적용한 교겐 공연을 적극 계발해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토털시어터’를 이끌고 있다. 2004년 중요무형문화재 ‘노가쿠’ 보유자로 지정됐다. 문화청예술선장신인상(2002), 키노쿠니야연극상(2005) 등 수상. 8일 열린 일본아카데미상에서 영화 ‘노보우의 성’으로 우수 주연남우상을 받았다.
현대극 하고 볼레로 추고 영화·방송도 출연
그는 뜻밖에 어린이들에게도 인기 상종가다. NHK교육방송 ‘일본어로 놀자’에 10년째 고정출연 중이기 때문. 교겐을 단순화한 재미있는 율동과 대사의 반복에 TV로 빨려 들어가는 유아들의 모습을 유튜브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몸소 개구리로, 모기로 변해 온몸으로 일본어의 감각을 표현하는 깜찍한(?) 연기는 고전을 어린이들의 친구로 만듦과 동시에 그 강한 중독성에 교겐 팬으로 거듭난 부모들도 적지 않다.
“이 시대에 교겐은 일반인들과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겐의 세계는 깊고 넓어서 많은 이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 연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맥베스’를 하고, 무용성을 부각하기 위해 ‘볼레로’를 춘다. 엔터테인먼트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재미난 영화에 출연한다. 또 미래 관객을 위한 선행투자 감각으로 교육방송에 나가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다.”
교겐과 무관한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니나가와 유키오, 미타니 코키 등 유명 연출가의 현대극 무대에도 오른다. 지난해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 ‘노보우의 성’은 일본아카데미 우수작품상을 받는 등 대히트를 기록했다.
“전통 무대와 현대 무대 양쪽 다 가능한 바이링걸이 되고 싶다. 17세 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계기로 양쪽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둘 다 성공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고전을 하다 보면 창작도 하고 싶고, 그러다 보면 또 영화에도 나가고 싶어진다. 맥베스에서 인간 욕망의 어리석음을 얘기했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제일 욕망이 많은 것 같다. 하하.”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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