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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들러 작품 보다가, 쉬다가 당구도 한 게임 할까

1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 ‘구슬모아 당구장’의 내부. 전시장 한 켠에 당구대가 놓여 있다.
길을 잘못 들었다 싶었다. 서울 한남동 29-4. ‘도착지 주변입니다’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와 달리 한남 오거리에서 유엔 빌리지로 들어오는 대로변엔 식당과 카페뿐이었다. 전화를 걸어 설명을 들은 뒤 식당 ‘차이니즈 웨스턴’과 ‘정인 부동산’ 간판 사이의 계단으로 내려가면서도 의심을 지우지는 못했다. 허름한 도시 뒷골목의 풍경이 그대로인 이곳에 갤러리라니. 삼색 공 모양에 ‘구슬모아 당구장’이란 촌스러운 글씨체의 간판이 보였다. 그 밑에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라는 작은 표시마저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서울 한남동 갤러리 ‘구슬모아 당구장’

2 ‘구슬모아 당구장’의 입구. 이전 당구장 간판을 그대로 유지했다. 3 나무 가벽을 세워 공간을 분리했다. 4 전시실 안쪽에 있는 ‘라운지’ 모습. 5 ‘Cy Choi’가 선보인 설치 작품.
오래된 당구장 개조해 만든 미술관
이곳은 대림미술관이 지난해 11월 문을 연 문화 프로젝트 공간이다. 다양한 분야의 신진 예술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실험적인 전시를 선보이겠다는 취지다. 미술관 측이 계획을 세워 터를 잡는 데만도 1년이 넘게 걸렸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곳, 그래서 예술의 감성을 충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력했던 가로수길이 빛의 속도로 상업화되자 한남동은 이를 대체하는 차선책이 됐다. 단국대가 사라지면서 상권의 변화가 일어나는 동네였다.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던 중 오래된 당구장 하나가 문 닫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미술관으로선 딱 떨어지는 공간이었다. “당구장이란 데가 그렇잖아요. 단골도 있고, 지나가던 사람도 부담 없이 들르고. 미술관도 당구장처럼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박주원 마케팅 큐레이터의 말이다.

의도가 이러한지라 딱히 큰 공사도 벌이지 않았다. ‘용도 변경’만 했을 뿐 이름도 그대로 뒀다. 가벽 몇 개를 설치하고 카펫만 걷어냈다. 화력 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런던의 테이트 모던 뮤지엄을 본떠 바닥과 벽은 휑하게 뒀다. 그 덕에 264㎡(약 80평) 전시실 한쪽에 있는 당구대와 30여 개의 큐대들이 더 눈에 띈다. ‘당구장 DNA’도 유지하고 전시 보러 왔다가 한 게임씩 쳐도 좋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남겨 둔 물건이다. 미술관 상주 직원인 김재영씨는 “실제 동네 주민 중엔 4시간 내리 당구만 치다 가는 이도 있다”고 귀띔했다.

갤러리 1층에 카페가 있듯, 이곳에도 관객들의 쉼터가 있다. ‘라운지(Lounge)’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지만 모양새는 소박하다. 전시실을 거쳐 좀 더 구석으로 들어가면 있는 이곳은 숨겨진 벽장 같다. 전시 보러 온 사람들, 카페 밖에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놀다 가라고 만든 공간이다. 법규상 먹을 것을 팔진 않지만 사 들고 와 먹을 수는 있도록 했다. 그 안에 정수기도 있고, 작은 냉장고에는 간단한 음료도 구비해 놨다. “와서 커피도 마시면서 수다 떨다 가는 이들이 많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관람료와 행사 참가비 모두 무료
현재 구슬모아 당구장에선 패션창작그룹 ‘씨와이 초이(Cy Choi)’의 전시가 한창이다. 패션 디자이너 최철용씨가 그래픽 디자이너 김도형, 일러스트레이터 오정택, 포토그래퍼 김권진, 영상 아티스트 안마노, 산업 디자이너 최근식과 함께 뭉쳤다. 이들은 런웨이에서 새 옷을 선보이는 컬렉션 형식을 탈피해 옷이 표현할 수 있는 영상·사진·표어·퍼포먼스 등을 다양하게 선보인다. 이번엔 ‘두 개의 그림자’라는 주제에 맞춰 시·사진·일러스트레이트가 진행됐다.

전시실 배경음악 역시 ‘Cy Choi’라는 제목을 붙여 만든 일렉트로닉풍 사운드다. 정작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옷은 딱 세 벌뿐. 그나마 제대로 바닥에 깔려 있거나 뒤집혀 있다.

구슬모아 당구장은 개관전으로 최씨 같은 국내 ‘10명의 젊은 창작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1월엔 건축그룹 Anl studio가 주인공이 됐다. 그리고 ‘씨와이 초이’ 이후엔 시인 유희경, 시각 예술가 정소영, 만물상 컨셉트의 길종상가, 건축가 박진택, 가구 디자이너 김소현과 판화 작가 이윤정, 실험음악가 조웅, 조형 작가 장성은 등의 전시 일정이 연말까지 차례로 잡혀 있다. 작가들은 전시 기간 중 한 번씩 관객들과 직접 만나는 기회도 갖는다. ‘페이스 토크(face talk)’라는 행사에서 작품 세계에 대해 문답하며 예술과 대중의 거리를 좁힌다. 매번 100여 명이 참가하며 성황을 이뤘다.

반갑게도 전시 관람료와 행사 참가비는 모두 무료다. 하지만 ‘당구장’을 찾았을 때 진짜 반가운 이유는 따로 있을 듯싶다. 이 도시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남은 무언가가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많은 이들의 사연을 담았던 당구장에서 이제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문의 02-3785-0667, 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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