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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디쯤 있는 옥스브리지 특별반

영국 극작가 앨런 베넷이 일흔 살에 발표한 ‘히스토리 보이즈’는 영국 북부의 지극히 평범한 남자 고등학교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 입시 특별반 아이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다. 당연히 이 연극에는 입시에 짓눌려 있는 시한폭탄 같은 아이들이 있고, 교육의 현실과 이상에 대한 논쟁이 있고, 이러한 여러 갈등을 더욱 몰아세우는 학교 밖 현실이 있다. 얼마 전 ‘학교’ 시리즈의 대중성과 폭발성을 입증했던 TV 드라마 ‘학교 2013’처럼 이 작품 역시 학교가 사회 모든 문제들이 소용돌이치는 문제적 공간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영국이나 우리나 교육 현실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노(老)작가 베넷의 작품은 사실 ‘학교’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이다. 무엇보다 문학교사 헥터(최용민)라는 캐릭터가 그렇다. 그는 영국의 온갖 문학작품과 작가들을 거론하며 아이들과 토론한다. 사창가에서의 역할놀이로 프랑스어 수업도 진행한다. 아이들이 재현하는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을 놓고 제목을 알아맞히는 돈내기 게임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헥터의 파격이 형식에만 그치는 건 아니다.

파격으로 치자면 젊은 역사교사 어윈(이명행)도 뒤지지 않는다. 특별반 합격률에 야망을 걸고 있는 교장은 케임브리지 출신 어윈을 특별반에 투입한다. 어윈의 수업에선 역사적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만큼 개성적이고 참신한가가 중요하다. 그는 홀로코스트마저도 어떻게 하면 ‘참신하게’ 논증할 수 있는가를 가르친다. 아이들은 혼란스러워하다가 기존의 통념을 전복하는 그의 논리 게임에 빠져들고, 입시라는 현실적 이해 속에서 예상문제 답안지에 적힌 어윈의 코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러한 두 인물의 대비는 스스로의 완성이냐 사회적 성공의 수단이냐 하는 교육의 목표와 현실에 대한 오래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노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언뜻 보기에 헥터는 이상적인 교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학생들을 추행해 해직 위기에 몰린다. 또 다른 역사 교사인 린톳(추정화)은 헥터의 문학수업이 성공하지 못한 인생들에 대한 마취제일 수도 있다는 비판을 던진다. ‘이상’이라는 우리의 믿음에는 이렇게 현실의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번역의 강 건너다 제모습 놓쳤나
‘히스토리 보이즈’엔 파국적 사건은 없다. 무대도 사건도 평범한 편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문학과 역사에 대한 지식의 현란함을 넘어, 그것이 지금 여기 삶의 뿌리를 깊게 깊게 파고들어가는 치열한 과정이라는 것을 힘 있게 설득해낸다.

사실 이 연극이 한국에서 개막된다고 했을 때 지극히 영국적인 이 희곡이 어떻게 ‘번역’이라는 강을 건널지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들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수업시간에 인용되는 문학과 역사는 공연의 전개에 방해되지 않았다. 물론 지적 현란함 탓에 원작이 환기하는 현실적 긴장감이 약화되는 느낌은 든다. 하지만 번역극에서 현실을 환기하는 서브 텍스트를 담아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논쟁적 주제를 설명하기보다는 극적 리듬으로 긴장감의 완화를 보완하는 선택은 적절했다. 앙상블의 리듬에 집중하면서 아이들 개개인의 성격이 드러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도리어 문제는 어윈이라는 캐릭터다. 어윈은 학력을 속여서 교사로 취직하고(그는 케임브리지 출신이 아니다), 오직 시험이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이고 목표라 가르치는 문제적 인물이다. 당연히 아이들을 심장으로 가르친다는 노교사 헥터나 헥터에게 근본주의적 질문을 던지는 린톳과 대립한다. 하지만 공연에서 어윈은 시종 반듯하고 공손할 뿐 이러한 논쟁적 대립에 반응하지 않는다. 하여 이들의 대화는 학교라는 공간을 설명해주는 교사들의 그렇고 그런 푸념이 돼버린다.

대신 어윈이 구축해온 반듯하고 단정한 이미지는 나중에 강력한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잘생기고 똑똑한 학생 데이킨이 그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때 어윈은 수줍어 어쩔 줄 모른다. 이 장면은 연출적으로 상당히 강조된다. 그동안 전개돼온 대립과 갈등이 무기력해질 만큼, 헥터의 죽음이라는 연극의 결말이 어리둥절해질 만큼. ‘번역’보다 더 넓은 희곡과 공연의 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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