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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펑더화이 제거 작심하고 3시간 자아비판

1951년 겨울, 한국전쟁 참전군 사령관 시절 전선을 시찰하는 펑더화이. 장소 미상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 도중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편지는 별것도 아니었다. 상대가 펑더화이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정권을 탈취한 혁명가였다. 권력기반이 군대이다 보니 군을 가장 중요시했다. 인민은 다음이었다.

1959년 여름 여산회의가 열렸던 여산인민극장. [사진 김명호]
펑더화이는 중공 정권의 창출에 공이 큰 개국원수였다. 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다. “펑더화이가 산으로 들어갈 결심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 올라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고 “노동자가 아니라면 농민이라도 좋다. 홍군 복장을 입힐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말도 평소 자주 했다. 마오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윗사람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 “펑더화이 편지는 단순한 건의가 아니다. 목적이 있다”며 마오쩌둥을 불편하게 했다.

펑더화이가 보낸 편지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한 마오쩌둥은 3일간 침묵했다. 펑더화이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안후이(安徽)성 서기 쩡시성(曾希聖·증희성)을 펑더화이에게 파견했다. 장정 시절, 중공의 비밀문건과 정보를 담당한 적이 있는, 마오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였다.

펑더화이를 찾아간 쩡시성은 “차 한잔 마시러 왔다”며 3가지를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남아있다. “주석에게 편지를 보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펑더화이의 대답은 간단했다. “목적은 무슨 놈의 목적,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럴 때 편지를 이용하는 게 우리의 오랜 습관 아니냐.” “소련 방문 기간 중 흐루쇼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나.” “흐루쇼프와는 대약진운동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린뱌오가 부주석이 된 것에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생각 해본 적 없다.”

쩡시성의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단독행동이라고 확신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펑더화이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7월 23일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단상에 오른 마오쩌둥은 “그간 참석자들은 많은 발언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차례”라며 좌중을 한 차례 둘러봤다. “그간 착오를 저지른 동지들이 많았다.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우파가 아니다. 배운 게 많다.”

마오쩌둥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자아비판을 시작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지난 2년간 뭐든지 빨리 이루기 위해 큰소리만 쳤다. 모든 잘못의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공자가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후손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멸종했다. 아들 한 놈은 전쟁터에서 죽고, 한 녀석은 미치광이가 됐다. 동생들도 모두 맞아 죽었다. 마르크스도 적지 않은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혁명의 그날이 올 거라고 했지만 서구에 혁명다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뭔가 심상치 않을 징조였다.

마오쩌둥의 발언은 그칠 줄을 몰랐다. “모든 신문이 우리의 잘못을 열거하느라 정신이 없다. 전국에 70만 개의 생산대가 있다. 모든 생산대가 한 건만 잘못하면 잘못한 건수가 70만 건이 된다. 일 년 내내 보도해도 불가능할 정도다. 앞으론 내 이름을 직접 거론해라. 꼭 망해야 한다면, 나는 떠나겠다.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뒤집어엎어 버리겠다. 해방군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해방군을 만들겠다.” 이날 마오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발언을 3시간 동안 했다. 펑더화이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발언이 끝나자 산회했다. 펑더화이는 맨 뒷줄에 있었다. 마오가 부르자 못 들었는지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마오가 달려갔지만 떠난 후였다. 회의장은 언덕 위에 있었다. 마오가 내려가자 공안부장 뤄루이칭(羅瑞卿·나서경)과 상하이 서기 커칭스(柯慶施·가경시) 등이 수행했다. 저만치 앞서가던 펑더화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회의장 쪽으로 올라왔다. 물건을 놓고 온 사람 같았다. 마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마오가 펑더화이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하자.” 시뻘게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펑더화이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몸을 돌려 펑더화이를 다시 잡았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얘기 좀 하자.” 펑더화이는 막무가내였다. 할 말이 없다며 마오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다. 수행원들 앞에서 마오의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봐서는 안 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뤄루이칭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커칭스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다. 저우언라이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숙소로 불렀다. 8월 2일부터 2주간 여산에서 중공 중앙 전체회의를 열라고 지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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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