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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냉정·겸손·깐깐 … 참, 다양도 하여라

2011년 7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피아노 부문 결선에서 연주하는 손열음씨. [중앙포토]
2009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 수상 한 달여 뒤인 그해 7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연 독주회. 이전까지 미국에서 이렇다 할 연주회를 한 적이 없던 나에게는 미국 데뷔 무대인 셈이었다.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일어서자 뜨거운 박수와 함께 청중이 하나 둘 기립하기 시작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거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무대 뒤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자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커튼콜 후 앙코르 한 곡을 연주해 다시 한번 큰 환호를 받은 나는 한껏 고무되었다. 또 뭘 치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무대 뒤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토록 열광적이던 청중이 하나같이 박수를 멈추는 게 아닌가. 어라? 하며 퇴장하는 사이 끝나버린 박수 덕에 음악회는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도 뜨겁던 반응이 어쩜 이렇게 한순간에 끝나버릴 수가 있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실수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사이 독일 청중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는 경우는 적지만 연주자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을 때까지 박수를 좀체 그치지 않는 이들이 독일 청중이다. 연주가 정말 좋았다면 오히려 서서히 환호성이 더해지고 맨 마지막에 가서야 기립박수를 보낸다. 포틀랜드에서의 연주 이후 미국의 다른 도시들을 하나하나 순회하면서야 비로소 나는 독일 청중과 정반대인 미국 청중의 패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연주가 끝나면 곧바로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내며 기립까지 서슴지 않지만 앙코르를 한 곡 듣고 나면 이제 이 음악회는 끝났구나 생각하며 일제히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충분히 열광적인 지지도 보냈고 이제 때가 되었으니 순순히 연주자를 놓아주자, 하는 이 사람들을 사무적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사려 깊다 해야 할지. 아, 여기서 다른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독일과 미국 청중의 반응 타이밍을 섞어 놓은, 가장 뜨거운 청중은 바로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연주자가 악기에서 손을 놓는 시점부터 몇 번이고 쉴 새 없이 무대로 다시 불러내는 한국 청중은 이미 전 세계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국경이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지구촌화된 21세기에도 나라마다 이토록 반응이 다르다니, 최후까지 남을 국민성의 발로일까. 그래도 미국과 독일·한국이야 서로 몇 만 리 떨어져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나란히 붙어 있으면서도 나라 하나하나마다 모두 다른 유럽 대륙은 신기할 정도다. 예를 들면 위아래로 맞닿아 있는 독일과 네덜란드 청중의 반응은 마치 독일과 미국만큼 다르다. 독일 청중의 반응을 기대하고 갔던 암스테르담의 첫 무대에서 의외의 반응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반응은 뜨겁지만 매우 짧았던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연주 후 반응의 차이는 그저 표면에 불과할 뿐, 음악을 대하는 그들의 기본적 자세야말로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독일 청중은 국민성처럼 매우 진지하며 또한 전문적이다. 독일의 한 도시에서 만난 음악평론가는 독일인은 심지어 오페라를 보러 갈 때와 오페레타(작은 규모의 오페라)를 보러 갈 때 각각 차림새를 다르게 하고 갈 정도라고 했다. 이해하기 힘든 난해함이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정수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그들은 일단 진중하고 무게 있는 음악회를 진정한 클래식 음악회로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로 듣기 어렵고 긴 곡을 연주하기에 독일만큼 좋은 곳이 없다. 독일 출신 작곡가들의 철학적인 곡들이 연주될 때면 연주자만큼이나 몰입도가 높은 독일 관객들의 진가를 만끽할 수 있다. 자기 나라 음악을 연주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러시아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차이콥스키나 라흐마니노프·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 등을 연주하면 러시아 관객들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대륙 기질을 전해 받아서인지 러시아인들은 또한 스케일 큰 음악·연주를 제일 높이 산다. 꽁꽁 언 날씨를 녹여줄 불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간다. 러시아와는 달리 타국인이 섣불리 그네들의 음악을 연주했다가는 무턱대고 비난 받기 십상인 곳은 프랑스다. 독일인들은 프랑스인들이 ‘라모’가 음악의 아버지인 줄 안다고 놀릴 정도니까.

종주국은 아니지만 클래식 음악 시장이 제일 큰 미국은 상대적으로 이도저도 아니라는 뭇매를 맞기도 한다. 그저 화려한 곡들과 쇼맨십 좋은 연주를 선호한다는 선입견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청중이 음악을 대하는 겸손하고 감사하는 자세는 큰 강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을 순순히 인정하는 동시에 무슨 음악이 되었든지 자신들에게 들려주는 음악가에게 감사를 표함에 매우 자연스럽다. 어쩌면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청중이 많은 한국과 가장 다른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응당 모두가 미국 청중을 더 좋아할 것 같지만 나처럼 한국 청중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는 음악가도 많다. 그런데 혹시… 아직까지 내가 연주해 보지 못한 제3국에는 이 두 청중을 섞어 놓은 완벽한 청중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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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