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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쉽게, 연금 적게 … 정치생명 건 개혁으로 경제 회생

2003년 9월 20일 베를린에서 슈뢰더 총리(왼쪽)가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가운데),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유럽 통합 및 이라크 전후 처리 등에 대해 담소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독일 통일의 주역으로 16년 간 집권을 하던 헬무트 콜 총리(1982~98년)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국민에게 새로운 희망과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통일 과정에 제시한 장밋빛 비전과 공약에 대한 기대감이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콜은 “3∼5년이면 통일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무한 약속이었다. 화난 동독 주민들은 그에게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 국민들은 장기 불황과 10%대의 높은 실업률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었다.

시대는 새로운 리더를 찾고 있었다. 기민당의 반대 진영인 사민당은 국민 앞에 스스로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1998~2005년)를 선보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콜 총리와 대비됐다. 그는 젊고 잘생겼으며, 박식하고 스마트했다. 그는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전략은 ‘캐치 올’(catch all)이었다. 한마디로 설명하면 나라의 모든 이슈를 어젠다로 삼아 쟁점화한 것이다. 미국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선거에 적용해 성공한 전략이었다. 셋 다 좌파 정당의 젊은 리더로 ‘제3의 길’ 혹은 ‘신(新)중도의 길’을 주창했다.

슈뢰더는 사민당의 지지기반이던 노동자와 교회 세력뿐 아니라 교사·지식인 등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독일 언론들은 “슈뢰더의 선거 전략은 중간층을 잡는 데 강점을 발휘한다”고 평가했다. 콜 총리가 애용해 왔던 중도로의 노선 이동을 통해 슈뢰더는 그를 쓰러뜨렸다. 당시 유럽에선 사민당 계열의 정권이 속속 출현했다. 유럽연합(EU)에 가입한 15개국 중 13개국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하거나 연정에 참여할 정도였다. 슈뢰더가 이끈 사민당은 72년 이후 처음으로 기민당보다 더 많이 득표했다. 과거 사민당 출신의 빌리 브란트와 헬무트 슈미트가 득표 수에선 기민당에 지고도 총리직을 맡은 건 자민당과의 소연정을 통해서였다.

청바지와 시가 즐기는 신세대 정치인
슈뢰더 시대엔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정부 차원에서 ‘적녹(赤綠) 연정’인 사민당·녹색당의 연합정부가 성사됐다. 처음으로 ‘중도 좌파’ 정권이 태동했다. 82년 연방의회에 처음 입성한 녹색당은 20년 만에 중앙정부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전후 세대인 슈뢰더는 나치의 악몽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었다. 그는 반전(反戰)과 탈권위를 내건 ‘68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슈뢰더의 승리는 독일 정치에서 세대교체를 의미했다. 젊은 정치인들이 대거 진출했다. 기민당에선 콜 총리가 정계를 은퇴했고, 처음으로 여성이자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이 기민당 총재 자리에 올랐다.

2005년 6월 베를린 총리공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슈뢰더 총리가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슈뢰더는 입지전적인 삶을 산 정치인이다. 어릴 적엔 생계가 어려워 야간 고교를 다녔다. 주경야독으로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18세에 청년사회주의자(Juso)로 사민당에 입당해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독일통일의 해인 1990년 그는 니더작센 주에서 기민당을 물리치고 녹색당과 소연정을 이뤄 주지사(90~98년)에 취임했다. 이는 8년 후 나타날 ‘적녹 연정’의 예고편이었다. 슈뢰더는 주지사로서 실적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무엇보다도 일자리 창출에 올인했다. 주 정부 차원에서 벤처기금을 만들어 젊은 층의 창업을 지원했다. 독일에선 처음으로 ‘사회적 기업’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니더작센 주에선 기업 숫자가 9.5%나 늘어났다. 독일 전역으로 보면 같은 기간 기업 숫자가 11%나 감소한 데 비해 괄목할 만한 실적이다.

그는 ‘사회복지국가의 현대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기존의 사회안전망을 더욱 현대화시켜 개개인 누구나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하는 정책이다. 실업수당 지출보다는 일자리 창출이 우선이었다. 그는 자주 ‘라인 모델’을 언급한다. 핵심은 진화된 ‘사회적 시장경제’로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기회 균등’을 강조하면서 부의 과실을 골고루 나누는 데 국가가 개입하는 모델이다. 노사공동결정제도가 그 정점에 있다. 사민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이다. 슈뢰더는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참여할 경우 기업 실적에 관심이 더 높아져 훨씬 더 좋은 성과를 올린다”고 말한다. 그는 노·사·정 타협을 통한 ‘일자리 동맹’도 추진했다.

슈뢰더는 98년 ‘동아시아 모델’과 한국식 경제개발 모델을 비판했다. “몇몇 개인과 독과점 기업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고, 이들은 세계경제 전략 분야를 차지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을 ‘기적의 종말’이라고 폄하했다. 슈뢰더로선 정치는 물론 경제 분야의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슈뢰더는 반전(反轉)의 정치를 즐겼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및 언론과의 관계다.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가까웠다. 그는 저서 『우리는 조국이 더욱 발전하기 원한다』에서 스스로를 “미합중국에 대한 비판적 숭배자”라고까지 말한다. 그는 신세대 정치인답게 청바지를 즐겨 입고, 고급 시가를 피웠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미국 편에 확고히 서서 테러세력을 비난했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을 시작으로 유럽과 독일에서 반미 정서가 확산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독일에서는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반미 시위가 거셌다. 슈뢰더는 2002년 총선 때 이를 정치적으로 적극 활용했다.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성토했다. 그 덕에 여론조사에서 밀리던 판세가 뒤집혔다. 그해 여름 독일 동부 지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했을 땐 곧장 현장으로 달려가 재난 극복을 진두지휘했다.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리더의 모습을 과시한 것이다.

독일 언론은 슈뢰더를 ‘미디어 총리’라고 부른다. 이는 양면적인 의미다. 주지사나 제1기 총리 시절만 해도 그는 미디어와 친화적인 관계를 가졌다. 주지사 땐 클린턴처럼 독일 TV의 인기오락프로인 ‘Wetten dass’에 출연해 말솜씨와 장기를 자랑했다. 총리 취임 후 그는 옐로 페이퍼인 ‘Bild’ 신문의 편집장 출신을 정부 대변인이자 언론정보처 장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제2기 총리 때부턴 자신을 지지했던 ‘Bild’ 등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조차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결정적인 실수는 2005년 총선을 앞두고 후보자 간 TV토론에서 일어났다. 그는 사회자를 공격하고, 야당 후보인 앙겔라 메르켈을 무시하고, 자신의 승리를 자신했다. 이게 유권자에겐 오만한 행동으로 비춰졌다. 선거 패인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는 스마트한 만큼이나 가볍게 처신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메르켈, 2005년 연설때 슈뢰더에게 찬사
2002년만 해도 독일의 장래는 암울해 보였다. 14%의 높은 실업률에다 경제 성장률은 마이너스(-0.1%)였다. 2003년 3월 슈뢰더는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자신의 지지층을 거스르는 사회·경제개혁을 추진했다. 이것이 유명한 ‘어젠다 2010’과 ‘하르츠 4’ 개혁이다. 총리가 발표한 ‘독일 경제재생 계획 10개항’은 충격적이었다. 핵심 내용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해 해고방지법과 연금·의료보험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정치권의 금기사항이던 연금제도에도 칼날을 들이댔다. 당시 세전(稅前) 평균임금 대비 53%이던 연금 수준을 2020년에 46%, 2030년까지 43%로 낮춘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연금 수령 나이를 65세에서 67세로 늦췄다. 연금에 발목이 잡혀 국가경쟁력이 계속 하락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독일 기업들은 다른 나라보다 무거운 사회보장 부담을 고민하며 해외로 떠나는 분위기였다. 그는 성장과 일자리를 위한 개혁 카드를 던졌다. 하지만 사민당의 지지층인 노조원들과 은퇴생활자는 분노했다. 어떤 불황이 닥쳐도 연금엔 손대지 않는다는 게 사민당과 노조세력의 원칙이었다. 개혁조치 발표 직후 여론조사에서 슈뢰더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어젠다 2010’은 간신히 의회를 통과했지만 슈뢰더는 ‘정치적 자살’이라는 평까지 들어야 했다. 사민당 당사는 ‘우리 연금에서 더러운 손을 치우라’고 외치는 수천 명의 시위대에 포위됐다.

그럼에도 슈뢰더는 정치적 도박을 선택했다. 개혁을 서두르면 독일 경제가 2~3년 안에 되살아나 다음 총선에서 사민당의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슈뢰더의 개혁은 독일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하지만 경제 회복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개혁 조치는 정치적 자살’이라는 경고가 들어맞은 셈이다. 그는 2005년 총선에서 패배했다. 슈뢰더가 추진한 개혁의 과실은 후임자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돌아갔다. 그 덕에 수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독일 기업들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메르켈은 2005년 총리 취임 뒤 첫 의회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슈뢰더를 찬양했다. “어젠다 2010으로 새 시대를 향하는 문을 열게 한 전임 슈뢰더 총리에게 감사드린다. 그는 용기 있고 단호하게 개혁을 추진했다.” 독일이 유럽의 리더국가로 부상한 것은 슈뢰더의 개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이 속한 정파·정당의 이익보다는 국가와 국민의 장기적 이익을 챙긴 것이다.

그는 퇴임 후에도 국제무대의 강연과 다국적기업의 사외이사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칩거 중이던 에르하르트나 콜 등 과거의 총리와는 다른 행보다. 독일 언론은 슈뢰더를 ‘정치 팝스타’라고 부른다. 그는 세 번 이혼한 뒤 네 번째 부인과 결혼해 살고 있다. 그에겐 자식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2명을 입양했다. 슈뢰더 총리는 정치란 재미있고 스마트하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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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