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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격동의 60년 … 그는 영국의 ‘닻’이었다

25세에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2세는 생애 대부분을 여왕으로 살아왔다. 미국 저널리스트 출신인 샐리 베덜 스미스는 “여왕이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삶을 위대한 배우처럼 연기해냈다. 그의 위엄에 찬 겉모습 뒤에 ‘또 다른 여인’이 숨어 있다”고 말했다. 즉위 60주년을 맞은 지난해 5월 영국의 한 대학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로이터=뉴시스]

퀸 엘리자베스
셸리 베덜 스미스 지음
정진수 옮김, RHK
783쪽, 3만5000원


군주제는 구시대의 유물인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이행하는 게 역사 발전이고, 문명의 진화라지만 전세계 196개국의 22%에 해당하는 44개국에는 지금도 왕이 있다.

 그 중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86)은 퇴색한 ‘로열 클럽’의 잔존 회원 중에서 독특한 지위를 누린다. 정치적 실권이 없다는 점에서는 다른 입헌군주국의 왕들과 차이가 없지만 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등 16개국 왕을 겸하고 있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 또는 속령이었던 54개국의 수반이기도 하다. 전세계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21억 명 위에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특별한 존재다.

 이 책은 엘리자베스 2세의 ‘다이아몬드 주빌리’(즉위 60주년 기념제)에 맞춰 지난해 나온 전기다. 뉴욕타임스 문화담당 기자와 ‘버라이어티 페어’ 편집장을 지낸 미국의 전기작가 셸리 베덜 스미스의 노작이다. 관계자 250여 명을 인터뷰하고, 책 100여 권과 각종 미공개 자료를 뒤졌다. 여왕의 친구들과 수석 고문, 집사 등 최측근부터 성공회 주교들과 정치인들, 조지 부시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까지 국내외 인사를 두루 만났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스물다섯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부친인 조지 6세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다. 저자는 비범과 평범의 균형이 그의 삶을 지탱한 기둥이라고 지적한다.

1953년 6월 열린 대관식장의 엘리자베스 2세(가운데).
 어린 시절 왕실교육은 여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람들에게 너무 멀게 느껴져서도 안 되지만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도 안 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사람들 앞에서는 울어서는 안 되고, 넘어져도 얼굴을 찌푸려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3000명의 시선을 견뎌내는 법과 자로 잰 듯이 걷는 법도 배웠다. 화장실에 안 가고 8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도 받았다.

 여왕은 매일 아침 ‘빨간 가방’에 담겨 전달되는 국내외 정세 보고서와 주요 외교전문을 읽는 데 하루 평균 3시간을 할애한다. 매주 화요일 저녁 여왕과의 주례회동에 준비 없이 온 총리들은 낭패 보기 일쑤였다. 윈스턴 처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까지 보수당과 노동당을 막론하고 역대 영국 총리들은 여왕과의 대화를 즐겼다.

 여왕은 상대를 편하게 해줄 줄 알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최대한 자제함으로써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말대로 ‘격동의 시기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닻’의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다각도로 읽을 수 있다. 왕의 운명을 타고난 한 인간의 색다른 라이프 스토리로, 특별한 지위에 요구되는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로, 전세계의 정치 지도자과 얽힌 정치·외교사로, 또 현대 국제정치의 이면을 보여주는 비화집으로 등등. 에피소드도 풍부하다. 즉위 후 처음 하사한 빅토리아 무공훈장이 한국전 참전용사에게 수여됐다던가,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이 자신의 딸을 여왕의 맏아들인 찰스와 맺어줄 생각을 했었다던가 등은 흥미롭다.

 엘리자베스 2세(35%)는 지난해 여론조사에서 빅토리아 여왕(24%)과 엘리자베스 1세(15%)를 제치고 ‘가장 위대한 국왕’으로 꼽혔다. 영국 국민의 80%가 여왕을 지지하는 것은 국민통합의 상징, 대영제국의 전통과 영광의 수호자로서 여왕이 영국의 브랜드 가치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여왕은 열세 살 때 보고 첫눈에 반한 가난한 그리스 왕자 출신의 필립과 결혼했다. 지중해 몰타섬에 파견된 해군장교 부인으로 지내면서 다른 부인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며 직접 현금을 주고 물건을 사던 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엄숙한 여왕이 기억하는 평범한 아내로서의 모습이다. 78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깔끔한 번역 탓에 술술 읽힌다. 한 개인과 시대를 읽는 전기문학의 힘이 살아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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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